캡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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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담을 굉장히 열심히 읽었던 때가 있었다. 어려서였다. 내가 좋아서 선택한 건 아니다. 난 어렸고 내 위의 언니가 좋아하여 읽다가 보니 나는 그 우수리로 읽었다. 50년대다 '야담과 실화'란 월간지가 있었다. 그걸 내 언니가 늘 구독하였기에 나는 이른 나이에 맛 들인 셈이다. 맛 들였다기 보다 그냥 심심한 시간을 때웠다. 근데 그게 은근히 내 안에서 역사의 얼개를 만들고 있음을 알 때는 좀 머쓱하다.

​며칠 전 과학자들의 대담에서 진화론은 진화라기 보다 변화라고 함이 맞다는 말을 들었다. 그냥 당연한 것처럼 무조건 앞으로 앞으로 전진만 하는 게 인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건 그 대화 청취 다음에 생각났다. 어느 기능은 퇴화란 걸 전혀 모르거나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진화의 그늘에 퇴화가 있다는 건 그냥 묵살해버리면 되는 걸로 알았던 듯하다.

​예전의 전투에서 장수들이나 군인들이 휘둘렀던 칼은 현대인이라면 아무리 힘센 장사라도 들 수도 없을 것이라는 말을 한다. 달리기나 도보는 어떤가. 완력으로 해내야 할 일들은 동력이 없을 시대의 사람들보다 현대인이 후질 건 뻔하다. 아마도 고인돌이나 피라미드 건설의 비밀의 작은 일부가 여기 있을 수도 있으려니 한다. 처음부터 진화는 변화가 아니라 진화였을까? 그 학술적 과학적 전문용어가 인간의 지능과 사회 발달에만 초점을 둔 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쉽게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해도 되겠다. 인간이 만든 많은 발전들이 너무 좋고 아름답고 편리하여 그 방향으로의 앞으로 나아감이 바로 발달이었다는 생각이라면 진화는 맞겠다.

​미국에서 작은 사회를 이루어 살고 있는 아미쉬들은 종교적인 믿음이 바탕이라고 하나 삶의 모양은 자연주의 같아 보인다. 인간이 만든 동력을 거부하며 살고 소비생활이 워낙 소박 검소하니까 내 머릿속에서는 아름다운 사회일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그 사회를 보면, 물론 나 같은 이방인이 직접 잘 들여다 볼 수는 없고 보도나 간접물 뿐이긴 하지만, 이미 문명에 오염된 눈으로 익숙한 생활로 판단하긴 하지만 그들과 함께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이걸 보면 변화라기 보다 진화가 더 맞지 않나 하는 판단도 가능하다.

​지금은 진화가 하나의 과학적인 전문용어로 자라잡았지만 진화가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님을 안다. 이제 인간복제가 가능하여지면 지금까지 전혀 불가능의 영역이었던 인간의 자질과 능력 수명 등에서 인간이 선택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과학적인 미래도 보인다. 어떤 무서운 사회가 올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나타나고 있다. 이 두려움 속에서 판단 내려야 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에 진화를 변화란 단어로 바꾸어보니까 이해의 폭이 더 넓어진다. 앞으로만 가면 뒤로 물러섬에 어려움이 있을 것 같지만 변화라는 말에는 쉽게 옆으로도 뒤로도 360도 한 바퀴 돌기도 하면서 긍정적인 것만 고를 수도 있겠거니 해서다.

​인간의 신창조론이나 진화론의 첨예한 대척이 변화란 말로는 좀 부드럽게 받아들여진다. 모든 생명들이란 주어진 그 순간부터 독자적인 생명 작업을 해왔으니까 변화하였고 변화는 인간을 중심에 두면 지금까지 진화 쪽이 더 무겁다. 여태 진화 쪽으로 변화한 인간들이 파괴자로 변화하려 할까? 그것도 순간 변화는 아닐 테니....반성과 숙고의 시간을 충분히 줄 테니까 파괴의 길로 들어섰더라도 물러서기도 하고 파행하기도 하겠지만 문득 멈추는 순간이 오겠지 하는 공상적이면서도 안일한 해석이 가능해진다. 용어 하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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