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관조하는 나이가 되어 깨달은 것

나는 어린시절부터 성년이 되기 까지 모친으로부터 " 고생 끝에 낙이 온단다" 라는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다.

고산지대를 등산하는 이를 우리는 등산가로 호칭한다. 내가 아는 제법 유명한 등산가에게 언젠가 물었다. "당신은 그 고통스런 고산 등반을 왜 하는가?" 그 대답은 참으로 엉뚱하고 그 당시 나로선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 나는 그 고통을 즐깁니다"

나는 중학교 3학년, 그리고 순천농림고등전문학교 3학년까지 학교 체육대회 우리 축산학과 마라톤 선수였다.  평소 나를 아는 이들이 믿어지지 않겠지만... 마라톤 대회를 서너달 앞두고부터는 밤에 공부하다 말고 마을 아랫 녘에 있는 간척지로 가서 구간정리해 둔 도로를 따라 멀리 신성포 가까이까지 약 2.5km를 왕복으로 매일 뛰는 연습을 해야만 했다. 이일이 처음에는 참으로 고통스럽다. 그런데 며칠을 훈련하다 보면 그 고통을 즐기고 있는 나를 빌견한다.

날이 갈수록 다리가 가벼워 지고 바람결을 가르며 뛰는 내가 즐겁다. 마라톤 선수들에게 똑 같은 질문을 하면 " 그 고통을 즐긴다"라고 답할 것이다. 심지어 황홀경에까지 빠지는 구간이 있다고 말한다.

공자는 <논어(論語)> 옹야편(雍也篇) 에서 이런 말을 했다. 知之者는 不如好之者, 好之者는 不如樂之者. "알기만 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보다 못하다.참으로 인생은 고달픈 일의 인생이다.  오죽했으면 불교에서 인생을 '고해(苦海,고통의 바다)'라고 했을까?

그런데 역설같이 들리겠지만 사실은 이 고통스런 인생을 즐기라고 주어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는 것이다.  즐기는 마음이 아니면 이 고통스런 바다를 건널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둘러대지 말고 실제로 즐긴 고통들을, 그 끄트머리를 정리해 보자.

나는 이 말을 1998년부터 2016년 까지 진행되었던 순천대학교 목장형유가공과정 교육 시간에 줄기차게 인용하며 힘들고 고통스런 목장형 유가공을 즐기자고 역설했다. 고통을 즐기는 달관된 마음은 얼마나 행복할까? 이것을 불교의 해탈, 기독교의 구원에 비길 수 있겠나? 해탈이나 구원 보다 더 높은 경지가 인생, 바로 삶이란 것이다. "살아 보고 말해"

올해 나는 조상 나잇법으로 74세이다. 70 평생을 살아 보고 나니 인생은 고해가 맞고 괴로움의 연속이란 사실을 부정하지 않고 그 고해가 주어진 명제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인생에 도대체 왜, 그런 고통과 괴로움이 주어 진 것이었을까?

살아 보고 나서 얻어 진것은 "그런 고통과 괴로움을 차라리 즐기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런줄도 모르고 고통과 괴로움이 심하고 견디기 힘들면 "죽어 버려야지, 죽어 버리면 끝이 아닌가?"라는 단세포적 생각에 얼마나 자주 붙잡혔던가? 다행히 그런 저런 고통을 거쳐 오늘의 나이에 이르러 보니 "아, 인생은 즐거움을 위한 소재였구나. 등산이, 마라톤이 그런 것 처럼..."의 결론에 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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