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를 위한 토요편지 제940호

(이미지 : uto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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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의 이유로 불행하다."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의 정체성이 가장 돋보이는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다. 70년을 살아보니 제각각의 이유나 사연은 선택의 문제였다. 자신의 의지대로 배우고 살아 가야하기에 자기 성찰의 자유가 없는 주입식 대학 교육을 거부하고 중퇴(中退)한 레프 톨스토이 백작이 필자(筆者)의 우상이 되었던 것은 문학적 재주가 아니라 그가 52세에 완성한 너무나 인간적인 참회록(懺悔錄) 때문이었다. 참회록 이후, 묵직한 인생론을 썼고 그로부터 30년은 ‘성장(成長)’을 삶의 화두(話頭)로 삼았다. 성장의 조건은 소통(疏通)과 몰입(沒入), 그리고 ‘죽음을 기억하는 삶’이라는 성장판이었다.

왠지 그럴 듯 하고 몹시 멋지다 싶어 무작정 따라 하기로 작정했지만 소통이나 몰입보다는 묘한 질문이 이어지는 ‘죽음을 기억한다는 것’에 천착(穿鑿)하고 고민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고민이 깊어지자 선택의 문제까지 도달했다. 다시 말해서 ‘죽음을 기억한다는 것’은 결국 용기가 필요한 선택의 문제였다. 그러하기에 윈스턴 처칠은 ‘선택은 용기를 키우는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나 싶다. 선택을 한다는 건 어떤 것을 얻기 위한 도전정신의 발현이며 심사숙고(深思熟考)하는 행동의 결과이다. 그 무엇이든 선택을 해야 어떤 결과를 얻을 수 있겠지만 성공, 실패 모두 큰 교훈을 주며 나아갈 다음 방향을 안내해 준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가 말했다는 명언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인생은 B(Birth, 탄생)와 D(Death, 죽음) 사이의 C(Choice,선택)의 연속'이다. 매순간 그 무언가를 선택하며 사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내가 빨리 죽을 것인지, 늦게 죽을 것인지, 건강하게 살다 편하게 죽을 것인지, 고통 속에 살다가 죽을 것인지, 만인의 애도 속에 죽을 것인지, ‘그 사람 죽어도 싸다’라는 비난 속에서 죽을 것인지, 모두 다 나의 선택, 즉 현재의 삶과 깊은 관련이 있다.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은 잘 살 수밖에 없는 이유다.

​틈만 나면 고향으로 내려가 막걸리 한 잔 따르고 성묘(省墓)하면서 조상님들과 얘기를 나눈다. 이른바 죽은 자와 대화다. 지금보다 더 잘 살기 위해, 조상님들과 약속을 하거나 스스로 한 다짐을 가슴에 새기는 의식이다. ‘끝없는 삶의 갈림길에서 조금 더 좋은 쪽으로 조금 더 옳은 쪽으로 더 사랑하는 쪽으로’ 박노해 시인의 시가 용기 없는 筆者를 산소로 이끌었던 것이다. 어떤 선택을 하기 위해 죽은 자와 대화한다는 것은 의미 있는 삶의 선택과 강하게 연결돼 있다. 그런데 우리는 죽음을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피한다. 그렇지만 눈(雪)이나 비(雨)를 피하 듯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그래서 ‘죽음학’이 있다. ‘죽음’이 뭔지를 배우는 것이다. 알게 되면 죽음의 ‘불안과 공포’를 떨치고 삶을 더욱 건강하게, 의미 있게, 밝게 살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죽음을 준비하면 삶이 달라진다.

그래서 독일과 같은 나라에서는 초등학교 때부터 죽음 교육을 받는다고 한다. 잘 살라고 죽음에 대해 배우는 것이다. 종교단체나 교육 단체들에서 삶의 소중함을 느끼게 하고 의미 있는 삶의 계기를 만들어 주기 위해 관(棺)에 들어가 보는 ‘입관(入棺) 체험’을 하기도 한다. 필자(筆者)도 예외 없이 교회학교 교사 시절에 가졌던 ‘입관 체험‘의 아찔한 경험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삶과 존재의 의미에 대하여 더욱 묵직한 교훈을 얻었다. 관속에서 생명에 눈을 뜨고 소생한 사람이 경험하게 될 감정과 흡사하다. 죽음은 두려운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되지만 오히려 삶이야말로 두려운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잠들 때까지 선택으로 하루가 시작되어 선택으로 하루의 끝이 난다. 인생은 선택의 예술이다. 삶에서 발현되는 예술은 창조와 지성의 '앎'이 아니라 용기 있는 선택의 힘이다. 끊임없이 선택하지 않으면 진정한 인생은 없다. 톨스토이는 참회록에서 말했다. ‘죽음을 망각(忘却)한 생활과 죽음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옴을 의식한 생활은 두 개가 서로 완전히 다른 상태이다. 전자(前者)는 동물의 상태에 가깝고, 후자(後者)는 신(神)의 상태에 가깝다.’ 사는 게 바빠 이 어마어마한 차이를 모르거나 무감각했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면 적어도 동물의 상태에서 점점 더 멀어져야 한다.  AI 인지감수성이 필요한 생성형 인공지능의 시대! 지금 우리는 자신의 운명을 바꿀(Change) 기회(Chance)를 선택(Choice)할 수 있는 기로(岐路)에 서 있다. 다시 나아갈 이유와 용기 있는 선택에 대하여, 그리고 신인류의 전략핵무기 AI 폰 시대의 성장에 대하여.

-시니어타임스 발행인 박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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