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를 위한 토요편지 제939호

오래 된 친구들을 잊어야 하나, 다시는 마음에 떠올리지 말아야 하나? 그토록 오래된 친구들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흘러간 옛날을 위하여, 그대여(---) 우리 다정한 축배를 들자, 흘러간 옛날을 위하여. 그래 너는 너의 술을 사고 나는 내 술을 살거야! 우리 다정한 축배를 들자, 흘러간 옛날을 위하여. 우리 둘은 언덕을 뛰어다니며, 아름다운 데이지 꽃을 꺾었지: 우리는 발이 닳도록 돌아다녔지

소박하고 순수한 평등을 꿈꾸는 시인(詩人) 로버트 번스(Robert Burns) 의 '올드 랭 사인 (Auld Lang Syne)'이다. 시대가 바뀌어 요즘은 잘 부르지 않지만 영미권(英美圈)에서는 노래로 편곡되어 졸업식장이나 송년파티 마지막에 단골처럼 흘러나오는 곡(曲)이다. 민요 가락에 시어(詩語)를 입힌 올드 랭 사인의 음률(音律)은 한동안 애국가(愛國歌)의 곡조로 쓰일만큼 유명했다. ​새해 인사로 여기저기 북적거리다가 2주(週)가 지났지만 정작 소중한 벗들에게는 '데이지 꽃'의 꽃말인 '희망과 평화'의 새해 인사를 제대로 전하지 못했다. 절친한 지인들에게 흘러간 시간의 안부를 묻고 사랑과 우정을 표했다해도 겨우 카톡에서 넘쳐나는 이모티콘이었기에 사랑과 우정(友情)은 커녕 공해(公害)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연유로 ‘올드 랭 사인’을 아스라한 향수(鄕愁)로 느낄 수 없는 만큼의 허전함으로 들어야 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자기 방에 혼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생긴다."는 파스칼의 말은 인간관계의 영역에 의존하는 것을 넘어서서, 자신의 능력을 키우라는 주장이다. 진정한 友情이 전제되어야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이다. 사는 게 뭔지? 평소 필자(筆者)의 삶이 수박 겉핥기였거나 건조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좀더 선명(鮮明)해졌다. 사랑과 우정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지만 만남의 빈도(頻度)보다는 밀도(密度)를 따져 엄지손가락부터 하나 둘 친한 지인들을 꼽아보면서 그동안 무관심했던 스스로를 책망(責望)하고 타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 먼 곳의 친구가 오기 전에 내가 먼저 찾아가야 했다. 수동적(受動的) 기다림의 정박(碇泊)이 아니라 출항(出港)이 먼저였다. 그 즈음에 떠오른 글귀가 있었다.

고려시대의 문호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李奎報1168~1241)가 30세를 전후(前後)하여 지은 5언 절구의 한시(漢詩)다. 눈이 하얗게 내리는 날 보고픈 벗을 찾아갔으나 이미 출타(出他)했는지 만날 수 없었다는 “설중방우인불우(雪中訪友人不遇)”라는 詩다. 몹시 깊은 사랑과 우정을 문자로 표현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漢詩는 세상에 없다. ​설색백어지(雪色白於紙) 눈빛이 종이보다 더 하얗기에 거편서성자(擧鞭書姓字) 채찍 들어 이름자 써두고 가니 막교풍소지(莫敎風掃地) 바람아 부디 눈을 쓸어가지 말고 호대주인지(好待主人至)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다오. ‘눈길에 친구를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함’이라는 이 詩는 벗의 집을 방문한 친구가 벗을 만나지 못하고 그냥 돌아와야 할 때에 마침 눈 덮인 땅이 하얀 종이와 같아 눈(눈)밭(田)에 글을 남기는 그림 같은 풍경이다. 눈을 녹일만한 뜨거운 우정과 사랑의 적요(寂寥)한 정서(情緖)가 물씬하고도 듬뿍 배어난다. 이 詩에는 자신이 다녀감을 친구가 눈치 채기를 바라는 마음과 만나지 못한 아쉬움이 이중적으로 잘 드러나 있다. 극명(克明)하고 너무나도 완벽(完璧)하여 첨삭불가(添削不可)의 詩다. “바람아! 집 주인이 올 때까지 기다려 다오” 이 대목에서는 너무나 애틋하여 눈물이 왈칵 솟는 느낌이 급격하게 가슴을 후벼판다. 지금처럼 통신이 발달한 세상이 아니어서 편지 한 통을 보내는 일도 비용과 시간이 만만찮은지라 미리 약속을 정할 수 없는 일이니 큰마음을 먹고 찾아갔어도 만나지 못 하는 일이 간혹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대로 돌아가려니 안타까운 일, 집 마당에 쌓인 눈 위에 채찍을 들어 큼직하게 이름을 써놓고 발길을 돌렸다. 친구가 집에 돌아와서 그 이름을 보면 얼마나 반가워할까. 그러나 눈이 녹아버리거나 바람이 눈밭을 쓸고 지나가면 지워질 터이니 이 또한 씁쓸한 일 아닌가. 친구에 대한 낭만적 갈망(渴望) 그 순정한 그리움이 잔설(殘雪)처럼 남는 詩다.

​친구 관계를 설파(說破)한 논어(論語)의 안연편 23장을 살펴보면 자공이 벗에 대하여 물으니,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충고하여 선(善)한 것으로 이끌되 안 된다면 그만두어야 하니,(이 일로 인하여) 스스로 욕됨이 없게 하라.” ‘착한 것 속에 보물이 있다.‘, 즉 선내보(善內寶), 선한 것을 서로 권하는 것이 좋은 친구의 역할인데, 권하였음에도 그 친구가 바뀌지 않는다면 거듭거듭 충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친구로 지내기 위해서는 장점은 띄워주되, 그 친구의 단점에서는 멀어져야 한다. 그 친구를 억지로 바꾸려하지 않고, 그 단점에서 내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찾고 배우는 것으로 그친다. 벗(朋)이란 그 사람의 덕(德)을 사귀는 것이기에 그 사이에 어떤 것도 개입시켜서는 안 된다. 혹여 지향이나 신념이 다를지라도 무색무취(無色無臭)의 속 깊은 사랑과 우정은 우리의 삶에서 활력(活力)을 공급한다.

이 나라 방방곡곡(坊坊曲曲) 이웃나라에서 먼 나라까지 발이 닳도록 돌아다니며 술잔을 부딪쳤던 친구들을 어떻게 잊을 수 있나? 각박한 세상 흘러간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활력을 공급해주는 친구는 단 한 마디로 다다익선(多多益善)이다. 이렇게 창조된 '善’은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보물이 된다.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꾼 로버트 번스의 간절한 소망이 담긴 詩 '아무리 그래도(A Man's a Man for a' that)의 한 구절이 귓가를 맴돈다. "······아무리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그날은 다가오네, 아무리 그래 봐도 온 세상의 모든 사람과 사람이 아무래도 결국은 형제가 될 날이"

-시니어타임스 발행인 박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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