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를 위한 토요편지 제936호

“글을 쓰려고 앉기 전에 깊은 행복감을 느낀답니다.” '장미의 이름'을 쓴 소설가 움베르토 에코의 글쓰기 언어다. 늘 그랬듯이 깊은 행복감은 없었지만 형편없는 쓰기로 시작해서 계속 나아지고 있다는 약간의 즐거움은 있었다. 그리고 우둔한 필자(筆者)의 고달픈 삶을 격려하고, 성장하게 하는 응원가(應援歌)이자 반딧불이 되어 준 편지들이 누군가에게 동기부여(動機附輿)가 되고 변화를 격동(激動)시키는 자극이 될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소명의식(召命意識)까지도 일깨워 주는 행운을 안겨 주었다.

​매일 매일 매순간 작은 개미들이 사과 껍질에 들러붙어 천천히 핥아먹듯 글감을 고민하고, 글의 전체적인 구조를 짜 맞추는 일부터 음미(吟味)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심지어 걷거나 먹으면서도 한 챕터를 쓸 수 있을 만큼 수단이 늘었다. 그저 써(書)야 한다(行)는 맹목(盲目)의 자발적 의무가 추동(推動)한 몰입(沒入), 그 집중(集中)이야말로 18년의 토요일을 지켜온 원동력이었다. 한 순간에도, 문득 문득 느끼는 것 바라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로 어우러지고 그 어울림을 문자로 엮어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은 스스로 자랑스럽고 뿌듯함이 없지는 않지만. 심쿵한 메시지가 담긴 글다운 글이나 재미나 의미도 없는 편지들이 즐비하니 두려움도 미안함도 마음 한 자락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요편지는 자발적인 감옥이었다. 몸과 마음은 그날의 체력을 다 쓰고 번아웃이 되었는데도 맘속에 열망이 들끓어 잠 못 이룰 때 토요편지는 筆者의 우울한 마음을 어루만져주었고 나아갈 길을 열어주는 북극성이 되어주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는 순간이 창조의 새벽이었다.

​하나의 생각에 집중하고 끊임없이 글로 만들고 그 글을 편집하고 그 곳에서 눈을 떼지 않았던 것이 여기에 이르러 산 중턱에 오른 노루처럼 무척 힘겹게 올라 온 길을 따라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악마를 뜻하는 Devil이란 단어의 어원(語源)에서도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devil은 ‘떼어내다, 동강내다’란 뜻을 가진 그리스어 ‘diabollein’에서 온 말이다. 이어가려는 의지를 억눌러서 지속성을 방해하거나 연결고리를 토막을 내는 게 악마의 주특기다. 악마의 손 안에서 매주 여기까지다 하면서 18년을 흔들리며 왔지만 글쓰기가 힘들다 한들 인생보다 힘들지는 않았다. 아름다운 풍경 앞에 서 있다면 글로 그 풍경을 잘 설명해야 하는 일이 숙명처럼 筆者의 일이 되었다. 편지를 쓴다는 것은 筆者가 보고 겪은 것들을 잘 설명하는 일이고, 쓰는 동안만큼은 나는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그 누군가를 생각한다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웠다.

​‘내가 만난 사람’ ‘내가 본 풍경’들을 떠올리면서 그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 여행하며 일상의 서사(敍事)와 인과(因果) 관계에 따른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쓰기 때문이었다. 토요편지는 노트북 자판에 올라탄 손가락의 행위예술이었고, 손을 따라(隨) 쓴(記) 마음의 노출(露出)이었다. 민낯으로 춤추는 낙서까지는 아닐지라도 시답잖은 쓰기에 불과하지만 외적으로는 수기(手記)이며 내적으로는 수기(隨記)였다. 그리하므로 세상에 널려 있는 그럴듯한 미문(美文)보다는 오롯한 筆者 생각의 순수한 지문(指紋)을 찾아 횡설수설(橫說竪說), 씨줄과 날줄을 맞추는 팩트다움의 서술(敍述)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일상적 서사에 가깝지만 신변잡기는 아니었다. 결코 아니어야 한다며 늘 다짐했었다.

​기승전결(起承轉結)의 정교한 플롯이나 소설같은 클라이맥스가 꼭 필요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마구잡이 글은 아니었다. 찐팬(?)에게 의뢰한다거나 나름의 방식대로 퇴고(推敲)를 거친다. 매번 불만족스러웠지만 단박에 바꿀 수는 없었다. 평소 글공부에도 게을렀고 기초를 닦지 않았다는 것 자조 섞인 위안을 스스로에게 건넸다. 결국 CEO 토요편지라는 음악회의 R석 관객은 筆者이기 때문이다. “한 대 맞은 것 같은 글이 아니라면 읽을 필요가 있는가?”라고 은근 슬쩍 글 솜씨를 자부하며 칼처럼 자문(自問)한 사람은 카프카였다. 그의 말을 듣다보면 쓰고 싶은 욕망보다는 기가 꺾이고 주눅이 들게 했던 세월이 18년이었다. 무릎을 치고 경천동지(驚天動地)할만한 글을 쓴다든가 무엇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어떻게 살고 싶어서라는 그 다짐의 파편들을 모은 토요편지를 통해 내가 몰랐던 내 얼굴을 보기도 하고, 그려 내기도 했다. 그래야 좀 더 따뜻하고, 여유로운 성숙된 삶을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편지를 쓰면서 소소한 즐거움 중 하나는 筆者의 편지를 읽은 독자들의 댓글이나 후기를 찾아보는 것이다. 모종(某種)의 의도를 담아 쓴 글의 의미와 메시지를 독자가 발견해 냈을 때 느껴지는 기쁨과 보람은 몹시 달달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전혀 의도(意圖)하지 않은 유의미한 메시지를 독자가 창조해 냈을 때 그것은 筆者에게도 색다른 배움이 되었다. 무척 쫄깃하였다. "봄의 정원으로 오라 이곳에 꽃과 술과 촛불이 있으니 만일 당신이 오지 않는다면 이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만일 당신이 온다면 이것들이 또 무슨 의미가 있는가" - 잘랄 앗 딘 루미,<봄의 정원으로 오라> ​꽃과 술, 꺼지지 않는 촛불이었던 18년의 흔적(痕跡)과 무게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의미심장한 질문의 화살은 청룡(靑龍)을 기다리는 筆者를 향(向)하고 있다.

-시니어타임스 발행인 박영희

 

저작권자 © 시니어 타임스(Senior Time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