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를 위한 토요편지 제930호

연극 '칼치'에  출연한 배우들
연극 '칼치'에  출연한 배우들

누구도 예외 없이 정상적 삶의 궤도를 벗어난 좋지 않은 인간관계의 모든 문제, 또는 ‘흑역사’는 사람답지 못함에 있다. ‘어떤’ 사람에 대해 ‘좋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에겐 '인간다움을 만들어 주는 그 무엇'이 있다고 판단을 내리기 때문이다. 인간다움이 어제보다 한 발 더 나아가 오늘을 살게 하는 탁월함이다. 인간다움의 탁월함은 매일(每日)이라는 무대의 역할이나 상황이 궁극적(窮極的)이거나 자족감의 밀도(密度)에서 탄생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가을 햇살이 눈부시고 모처럼 가을답게 청명했던 10월의 마지막 토요일, 지인(知人) 자녀의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하객(賀客)다운 옷을 입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서울 장충동 소재 신라호텔의 야외(野外) 결혼식장은 마치 드라마 촬영(撮影)의 세트장처럼 화사했고 격조가 달랐다. 어느 집안 혼사(婚事)의 하객(賀客)이라기보다 선남선녀의 사랑이 결실을 맺는 드라마에 출연하는 조연(助演)처럼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옷매무새를 고치기도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조연 역할을 즐기면서 괜찮은 조연답게 축배(祝杯)의 잔을 들어 마침내(竟) 성혼(成婚)에 이른 신랑신부다움을 축하했으며 모처럼 '좌빵 우물' 이라는 경양식 점심식사를 마친 후, 무슨 일이든 의기투합(意氣投合)하는 몇몇 지인들과 함께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진짜 연극(演劇)을 보려고 대학로 동숭동으로 발길을 옮겼다.

예매해 두었던 연극은 평소 친분이 있었던 개성파 배우 겸 연극인 송영재씨가 출연하는 ‘칼치’였다. ‘칼치’는 ‘갈치’의 경상도 방언으로 어종(魚種)의 생김새가 칼 모양이라 해서 ‘칼치’로 불리고 있다. 성격이 급해 배에 잡혀 올라오는 순간 스스로 죽어버리기도 하고, 먹을 것이 없을 때에는 포악스러운 성격으로 동족(同族)을 잡아먹기도 하는 등 탐욕적(貪慾的)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이런 ‘칼치’의 성정(性情)에 빗대어서 만든 풍자극(諷刺劇)이다. 망망대해(茫茫大海)라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삼봉호”에서 있었던 일련(一連)의 사건을 통해 서로 물고 뜯는 험악한 상황에 내몰릴 때 나타나는 인간의 ‘악랄함’을,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인간의 ‘잔혹성’을 아프게 꼬집었고, 인간다움에 대하여 성찰하도록 질문하였다. 살아 돌아온 기관장 ‘명호’의 증언을 바탕으로 재구성(再構成)된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느낄 수 있는 긴장감과 작품 후반기(後半期)의 극적인 클라이막스 등 ‘연극’이라는 장르가 보여줄 수 있는 ‘언어’, '몰입도(沒入度)’, ‘반전(反轉)’의 재미를 제대로 보여주었다. 모든 배우들이 조난(遭難) 당한 바다에서 사투(死鬪)하는 것처럼 현장감 있는 연기로 감동을 안겨 주었으며 특히, 船主 송영재의 고감도 능청스러운 연기는 일품(逸品)이었다. 관객으로서도 만족했지만 그가 출연하는 연극을 볼 수 있어서 뿌듯했다. 과거 어느 때보다 더 큰 호흡에서 나오는 음량, 웃음의 밀도까지 조절하는 등 탐욕적이고 음흉(陰凶)한 船主다움의 명품연기였다.

열악한 대학로 극장의 열성적인 관객답게 숨을 죽이고 배우들의 열정 페이 연기와 줄거리에 몰입하던 중에도 귀찮을 정도로 2014년 세월호의 침몰과 1912년 타이타닉호 사건이 오버랩되었다. 너무나 탐욕스러운 세월호 船主는 물론 침몰 직전 선내(船內) 방송을 통해 “가만히 있어라”고 말해 놓고 자신은 가장 먼저 팬티 바람으로 배에서 탈출한 세월호의 악마(惡魔) 선장 때문이었다. “해난 사고 시에는 모든 승선원들을 먼저 구조한 후에 맨 마지막으로 배를 떠나는 것이 선장의 임무“라면서 삼봉호 선장은 반항하는 선원들을 위무(慰撫)하려 했으나 가증스러운 술책이었고 기만(欺瞞)이었다. 연극이 끝나고 삼봉호 선원들에게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의 연민 船主와 船長에 대한 분노가 일어날 즈음에 111년 전, 북대서양에서 침몰한 타이타닉(Titanic)호와 운명을 함께 한 船長 '에드워드 존 스미스'의 생각이 겹쳤다. 타이타닉 선장은 구명보트를 구해 주어도 적극 사양하면서 노인, 어린이, 여자들을 먼저 구조하라면서 선원들을 격려했다. "Be british!“, "영국인답게 행동하라"고 마지막 순간까지 외치며 자신의 임무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배에 남아 침몰한 타이타닉호와 운명을 함께 했다. 타이타닉을 설계했던 사람도 기관장이나 주요 선원들도 끝까지 자기 위치에서 영국인답게 행동했다.

여기에 이르면 공자(孔子)의 멋진 말씀이 생각날 것이다. ‘군군신신 부부자자(君君臣臣 父父子子)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비는 아비답고 아들은 아들다움이라야 사람의 모습'이라는 소중한 가르침이다. 위의 가르침과 반대일 경우, 이 가을 추수한 곡식이 있어도 어떻게 먹을 수 있겠냐?는 너무나 인간적인 반론을 이끌어내는 근엄한 권고다. 每日이라는 무대에서 끊임없이 펼쳐지는 일상들이 인간다움으로 채워지는 괜찮은 하루가 가끔씩 있다. 그런 하루가 풍요롭고 아름다운 인생의 필요충분 조건이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보람찬 하루가 과연 몇 번이나 있었던가! 가을답게 몹시 청명했던 10월의 마지막 토요일 하루는, 한국인 최초로 골든글러브 남우 조연상을 수상한 <오징어 게임>의 오영수처럼 괜찮은 助演답게 즐기며 한 걸음 더 멀리 나아간 매력적인 하루였다.

-시니어타임스 발행인 박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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