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를 위한 토요편지 제929호

황혼 무렵 낙엽의 모습은 너무나도 서글프다.

바람이 불면 낙엽은 속삭인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깊어가는 이 가을! 오색(五色) 찬란한 빛으로 거리를 뒤덮는 낙엽들은 모두 가을의 꽃이다. 살아온 세월만큼의 경륜(徑輪)이 묻어나거나 어른스럽지 못하고 왠지 조급한 필자(筆者)의 속마음도 덩달아 가을꽃이 된다. 그런 연유로 붙잡을 수 없는 계절이기에 조금만 더 늦게 떠나주기를 바라면서 프랑스 시인, 소설가 ‘레미 드 구르몽’이의미심장(意味深長)하게 묻고(問) 있는 인생에 대한 단상(斷想), 그 독특한 감각과 상상으로 부조(浮彫)된 여성 ‘시몬’을 생각하다가 그 생각의 힘을 얻을 만한 방호정 작가의 <갖고 싶은 초능력>과 선물처럼 만났다. ‘일사일언(一事一言)’에 투고(投稿)했던 칼럼이다. 순간이동(瞬間移動) 같은 비현실적인 재능이 아닌 초능력 하나 쯤은 있어야 슬프도록 아름다운 황혼에서 또다시 찾아오는 새벽까지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부산 힙스터 연맹 본부장이자 인기 웹툰 작가인 배민기와 맥락 없는 수다를 열심히 떨던 중에, 그가 최근 재미있게 본 영화 한 편을 추천해줬다. 그러고선 “아, 별로일 수도 있어요. 사실 저는 웬만하면 다 재밌게 보거든요”라고 덧붙였다. 사실 배민기의 그런 성향을 이미 파악하고 있기에 그의 추천작을 100% 신뢰하는 편은 아니었다. ​인터넷에 떠도는 별 웃기지도 않는 유머 게시물을 살피다보면 ‘가지고 싶은 초능력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만날 때가 종종 있다. 대답을 하는 코너에는 투명인간, 순간이동, 비행능력 같은 비현실적 재능이 나열되어 있다. 그런 질문을 만날 때마다 부질없이 한참씩 고민을 반복하다가 ‘이게 과연 고민씩이나 할 일인가’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하나 그 순간, ‘웬만하면 뭐든 다 재밌게 받아들이는 능력이라면 이건 뭐, 거의 초능력이라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 참 유용하고 부러운 능력이다. 예를 들어 배민기와 함께 영화관에 가서 같은 영화를 보면서 내가 대한민국에 산재한 정치적 문제와 인류의 미래, 지나간 옛사랑의 기억, ‘그땐 왜 그랬을까‘, ’나중에 뭐 먹지?‘ 등등의 잡다한 생각에 시달리는 동안 배민기는 끝까지 영화에 흠뻑 빠져 몰입하는 것이다. 뭔가 몹시 분하고 손해 보는 기분이었다. ​그런 이유로 그날 술값은 가공할 초능력을 지닌 배민기가 계산하는데, 어쩌면 나도 노력하면 그런 초능력 정도는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이 생겼다. 일단 투명인간이나 순간 이동보다 훨씬 실현 가능성이 높다.

​사람들은 대부분 서른 살 이전에 듣던 음악을 반복해 듣는다고 한다. 동년배 아재들은 생소하거나 잘 모르는 음악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는 점이 수년 간 LP바에서 DJ겸 바텐더로 활동하며 관찰해온 내 결론이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분명 손해다. 그깟 취향이 뭐라고 더 많을, 보잘것없는 취향을 핑계로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새롭고 빛나는 재능을 너무 쉽게 외면해왔던 게 아닐까? 심지어 평균 수명도 길어져 살아온 곱절을 더 살아야 할 수도 있으니, 이제부터라도 손해 보지 않도록 그런 초능력을 가져야겠다.

초능력이란 아무나 가질 수 없겠지만 특별한 사람들의 비법(秘法)이나 마법(魔法)이 아니다.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다. 먼저 베풀고 먼저 사랑하는 것, 카톡에 올리는 글에 이모티콘이라도 화답하거나 보고 싶다고 전화하는 것, 너무나 개인적이거나 처음 대하는 낯선 것, 또는 전혀 새로운 것을 싫어하지 않는 것부터 초능력이 나온다. 이런 초능력은 인공지능(AI)이 진화할수록 어떤 품격의 단위(單位)로 자리매김 될 것이다.

급한 것보다 중요한 것에 집중하면서 사소함에도 몰입하는 등. 겨울이 오기 전에모든 것을 내려놓으려는 가을꽃과 마주하며 서로의 애환(哀換)을 전하고 듣는 재능,이름 모를 들풀에게도 따뜻한 미소를 보내는 능력, 뭐든지 다 받아들이는 긍정 마인드, 그 넓은 가슴을 지니는 것. 10월의 마지막 날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을 추억하는 것도 감미로운 감성(感性)의 남다른 능력이겠지만, 황혼 무렵 낙엽을 밟으며 함께할 수 없는 ‘시몬’에게 질문하는 호기심은 초능력이다.

-시니어타임스 발행인 박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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