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를 위한 토요편지 924호

김동일 동국대 일산한방병원장
김동일 동국대 일산한방병원장

그야말로 운수(運數)가 좋았다. ‘찐 의사'와 관련된 수필집을 우연하게 읽게 되었지만 예기치 못한 선물이 문 앞에 도착한 것처럼 반가운 자극과 울림으로 몹시 흐뭇했다.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며 아득히 먼 곳에 홀로 있어도 가까이 있는 듯 정(情)다운 한가위 보름달처럼 밝은, 휴먼 스토리였다. 인간 경영학에서 공유(共有)의 본능은 참 인간의 고유함이라 했다. 오고 가는 情에 울고 웃는 너무나 인간적인 파장을 共有하고 싶었다. 황 건의 에세이 ‘거인 어깨에 올라서서`에 소개된 의사(醫師)는 보기 드문 의사(義士)로 ‘보답`편에 나온다.

영국을 떠나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에서 60세 정도로 보이는 승객이 일등석과 삼등석 사이의 주방 바닥에 누워 있었다. 15일간 여행 중 이틀째에 설사가 나고 몸이 아파 일행과 헤어져 귀국하는 길이었다. 장염(腸炎)으로 인한 탈수증상인 환자(患者)를 응급조치했던 醫師는 집에 돌아와서는 이미 그 일을 잊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문자(文字)가 온 것이다. 文字를 확인한 醫師는 그 번호를 눌렀다. 목포에 있는 교회 목사라고 하였다. 덕분에 살았으니 어떻게 보답할 수 있을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는 천주교 신자입니다만, 주일 예배 때 ‘그 의사`가 죽을 때까지 초심을 잃지 않도록 기도해 주세요.” 라고 말하는 내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그가 알아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꼭 그렇게 하겠노라고 약속해 주었다.

<거인의 어깨에 올라서서> 이 책의 작가 醫師 황 건은 ‘과학과 예술 분야에서 넓은 이해력(理解力)과 지식과 교양(敎養)을 겸비(兼備)한 사람이라는 사전적(辭典的) 정의에 상당히 가깝게 다가간 분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고 의사 시인 마종기씨는 황 건을 극찬(極讚)했다>

위의 내용을 포함 醫師 '황 건'의 수필집을 모두 읽고 덮으려는데 의학(醫學)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 선서 중에서 "나는 나의 삶과 나의 의술(醫術)을 순수(純粹)하고 경건하게 유지(維持)할 것이다."라는 한 구절(句節)이 오버랩(overlap)되면서 하얀 가운이 잘 어울리는 한 사람이 생각났다. 純粹하고 경건(敬虔)한 삶을 통해 의술을 펼치는 좋은 醫師를 꽃피는 봄에 만났다.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던 내 인생의 선물이었다. 돈 버는 직(職)이 아니라 소명의식의 업(業)으로 삼고 늘 유쾌하게 살아가는 흔치 않는 醫師이며 후학(後學)을 양성하는 멋진 교수(敎授)다. 지난 봄학기 인문학 AMP에서 함께 공부한 동국대학교 일산한방병원 원장 김동일(金瞳一) 박사다. 틈나는 대로시(詩)를 쓰는 그는 여성한방의학의 권위자다. 지병(持病)이 있는 어떤 환자는 그가 근무지(勤務地)를 옮길 때마다 무려 30년을 뒤따라 다녔을 만큼 믿음직한 명의(名醫)다. 환자는 종종 의사의 진심어린 태도에 감명을 받아 회복되기도 한다. 때문에 醫師에게서 인문학적 소양, 즉 인간적 신뢰가 없다면 그가 가진 醫術은 밥벌이 수단이거나 돌팔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자주, 그리고 빈번하게 자작시(自作詩)를 지인들 단톡방에 올린다. 꼬박 꼬박 댓글을 달아 독자임을 알리는 筆者는 그저 올리는 게 아니라 시작(詩作)의 발표로 간주(看做)한다. 그가 발표하는 詩마다 태생적으로 흘러넘치는 시심(詩心)으로 기성 문단에서 활동하는 시인(詩人)의 수준을 능가(凌駕)한다.

​조용한 방

늦은 밤이다

공연히 지난 일들이 생각나서

거실 소파에 모로 누워 있었다

네 개의 방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는다

아랫집이나 옆집에서도

층간이건 벽간이건

들려오는 소음이 없다

어머니가 주무시는 방도

´기척은 없다`

기침 잦았던 지난 겨울밤부터

나는 조용하지 않은 밤이

힘들었다가

언젠가는 조용한 밤의

조용한 방이

불편해지는 것이었다.

(이하생략)

보고 만질 수 없는 사랑을 보고 만질 수 있게 하고픈 사모곡(思母曲)이 아름다운 사람의 몸을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꼼꼼히 눌러 읽다보면 외로운 몸뚱이의 思母는 참 인간의 길이라는 것을 共有하게 된다. 상상되는 효심(孝心)의 간절함과 절실함이 절절(切切)하다. 醫術을 펼치는 근저(根柢)에 인문학이 스며든 그는 애틋한 시어(詩語)들을 진맥(診脈)을 하는 듯 조심스럽게 해부(解剖)하는 인문적 말 걸기의 ´조용한 방의 불편함`이 눈물샘을 자극한다. 사실의 객관적 진술에 불과한 <기척´이`없다>가 아니라 정서(情緖)의 세계를 표현한 <기척‘은’ 없다>에서 마침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詩的 메타포의 키워드인 소음(騷音) 없음의 역설(逆說), 드러내고 싶지는 않은 孝心은 태어날 때부터 마음속에 작곡(作曲)된 심포니처럼 멋지다. 그런 연유(緣由)로지금은 환자(患者)와 醫師라는 긴장 관계의 마음을 풀고 밤늦게까지 지적(知的) 스파링 파트너로 하우스 와인을 마시는 홈빠의 낭만주객(浪漫酒客)으로 발효(醱酵)되었다. 이 또한 귀한 선물이다. 통원 치료를 하고 나면 SNS를 통해 한방 외래 만족도를 리서치 한다. 병통(病痛)의 후유증으로 얼마간 계속되겠지만 언제나 만점을 준다. ​허준의 의학백과사전 동의보감(東醫寶鑑)을 몸과 마음으로 실천하는 최첨단 의료 서비스 뿐만이 아니라, 애틋한 母情을 노래한 思母曲 때문이다. 추석 명절 때마다 무시로 소환(召喚)되지만 지겹지 않을 만큼 깊은 情이 든 속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의 큰 손님 추석 보름달을 解剖하면 ‘선물(膳物)’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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