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를 위한 토요편지 922호

그런대로 잘 살아가고 있지만 어딘가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할 때 바쁜 일상을 쪼개어 혼자서 또는 함께 놀이나 게임을 한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게임이나 오락, 흥(興)겨운 '놀이'는 시간을 내어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삶의 일부가 되어야 때론 군중(群衆) 속에서도 외로운 마음의 족쇄를 풀어낼 수가 있다.

전무후무(前無後無)한 대한민국 최초의 밀리언셀러 '인간시장'의 김홍신 작가는 “내 인생 사용설명서”의 에세이를 통해 “잘 놀다 가지 않는 인생은 불법(不法)“이라고 경고(警告)했다. 힘겨운 일보다 놀이를 더 좋아하는 筆者는 공감(共感)을 넘어 환호작약(歡呼雀躍)했다. 초청 강연 중에는 경중(輕重)을 가릴 것 없이 일중독(workaholic)같은 미필적고의(未必的故意)를 명시(明示)하며 지금 이 시간부터 잘 놀다 가라고 부추긴다.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요한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Homo Ludens)’에 의하면 노동에서 해방된 시간을 놀이로 소비하는 사람, 즉 '노는 인간' 또는 '놀이하는 인간'이 ‘호모 루덴스‘라는 것이다. 오역(誤譯)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인간 존재의 본질이 놀이에 의해 정의된다면 인간이 노는 것 자체를 추구(追求)한다는 뜻이고, 정서적으로는 유희(遊戱)라는 관점에서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물론 쾌락만 추구하면 인간의 관점에서 예외다. 이런 점에서 호모 루덴스는 삶을 있는 그대로 영위하라는 가치와 연결된다. 비로소 인간다워진다는 것을 함의(含意)한다. 그런 연유로 심각함이 불필요한 인간의 놀이 문화는 긍정적인 반면, 일상의 진지함과 무거움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진지함은 '놀이하지 않음'일 뿐이지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진지하지 않음', '심각하지 않음'이라고 단정하거나 정의해서는 놀이의 의미가 완전히 파악되지 않는다. 놀이는 그 자체로 독립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주관적 당위(當位)와 옳음만으로 살 수는 없다. 명확한 목적 지향(指向)의 부담 지우는 삶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쉽게 지친다. 그런 점에서 건전한 놀이 문화를 삶의 방식으로 삼는 건, 지금을 합법적으로 살아가는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한 선택이다. 우리 삶에 많은 고통과 긴장(緊張)이 스며드는 것은 '놀이'라는 중요한 삶의 형태를 망각(妄覺)했기 때문인지 모를 일이다. 놀이를 통해 자연과 사람, 사람과 사람의 그 오묘(奧妙)한 관계를 해석할 수가 있고, 성장 발전시킨다는 것도 부인(否認)할 수 없다. 놀이의 특성에 따라 어떤 사람과 함께 있는지 어떤 놀이를 하는지가 그 사람다움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만큼, 두 명 이상의 참가자(參加者) 사이에 수준별 레벨이 맞지 않고 비대칭이 뚜렷하다면, 놀이나 게임에 참여(參與)할 의사(意思)는 위축(萎縮)된다. 만약 놀이가 가져오는 이익에 연연하지 않을 만큼 서로 엇비슷하여 놀이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면 샘처럼 솟는 카타르시스는 무궁무진(無窮無盡)하다.

사실 관계를 손상하지 않는 선에서 소개한다면 접근성이 양호하고 가성비(價性費)가 탁월한, 몹시 재미있는 당구(撞球)는 불확실한 노년(老年)의 텍스트 같은 놀이다. 값비싼 골프공보다 훨씬 더 큰 공을 거의 공짜로 치지만 놀이 규칙도 간단하고 신의성실의 규칙을 위반하는 무개념, 무매너의 알까기(?)는 물론 OB도 없다. 이렇게 심플한 당구 놀이로 벌어진 일들이 너무나도 환상적이기에 공개하지 않을 수 없다. ‘마음 내키는 대로 행해도 법도에서 벗어남이 없다‘는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 즉 고희(古稀)를 넘겼지만 아직 은퇴하지 않고 활동하는 등 삶의 방식이나 취향, 정서적인 레벨이 비슷한 세 친구가 4년 6개월 전부터 매주 일요일 오후가 되면 당구를 즐긴다. 일주일을 벼르다가 가볍게(?) 당구를 치고, 소줏잔을 기울이며 소소한 일상을 나누는 정담(情談)중에는 ‘빨리 죽지 말고 조금 더 당구 치다가 죽자’는 실없는 농담도 하게 된다. 서로 바쁘게 살면서 인생이 즐겁다고 느끼는 힐링의 순간이다. 흥미를 돋우기 위하여 당구를 칠 때마다 모아 두었던 와인이나 기념품 등을 시상품으로 내건다. ‘요한 하위징아’가 제시한 ‘경쟁(競爭)과 모의(模擬)’를 인용(引用)한 것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두 사람만의 경쟁심을 부추기는 성동격서(聲東擊西)의 ‘模擬‘겠지만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취(取)하려는 筆者의 수작(酬酌) 쯤으로 의심(疑心) 하면서도 당구의 천적(天敵)이자 선한 앙숙(怏宿)인 두 친구는 짐짓 모르는 척 競爭한다. 競爭 구도(構圖)의 模擬가 유효(有效)했는지 지금까지의 승률(勝率)은 筆者가 1위다.

​아무튼 소확행(小確幸)의 원천(源泉), ‘놀이는 문화의 한 요소가 아니라 문화 그 자체가 놀이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하위징아는 역설했다. 인간의 놀이로부터 건강한 사회적 문화로 발화(發火)될 수 있다면 구태의연(舊態依然)함이란 있을 수 없는 만큼 시간가는 줄 모르는 몰입(沒入)을 통해 활기찬 삶의 단서(端緖)를 붙잡을 수도 있다. K-pop 등 한류 문화의 인기가 그 어떤 것보다 국위 선양을 하는 걸 보면 삶의 재미를 추구하는 활동으로서의 놀이가 인간에게는 선물이며 운명적이다. 누구와 함께 어떤 놀이들로 삶을 채울지 고민하고 행동하다 보면 한 번 뿐인 인생이라는 무대의 주인으로 잘 놀다 가는 자신만의 놀이(play) 기술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호모 루덴스 문화로써의 놀이, 축적(築積)의 시간이 필요하다. 내일이면 늦다. 지금 바로 이 순간부터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때로는, 진지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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