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관령이 고위 평탄면이 만들어진 지질학적 역사와 고랭지 농업

대관령의 지형
횡계고원은 북쪽으로 동대산(1,433m), 황병산(1,407m), 소황병산(1,329m), 동쪽으로 매봉(1,173m), 곤신봉(1,128m), 대관령(832m), 서쪽으로 장군바위(1,140m), 싸리재(800m), 그리고 남쪽으로 발왕산(1,458m), 옥녀봉(1,146m) 등으로 둘러싸인 산간분지다. 그리고 분지 내부는 17~22도 정도의 완만하고 평활한 면경사로 50~100m의 기복이 있는 구릉성 지형을 이루고 있다. 인공위성 사진을 보면 분지 일대가 주변 산지들에 비하여 평탄면을 이루고 있음을 더욱 확연하게 알 수 있다.

어떻게 이렇게 높은 곳에 분지성 고원지대가 형성될 수 있었을까? 그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이곳 일대의 지질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횡계고원 일대의 지질은 중생대 쥐라기 말 약 1억5천만~1억3천만 년 전 사이에 대보조산운동에 의해 관입된 흑운모 계열의 화강암이 기반암을 이룬다. 그러나 인접한 북쪽의 오대산 부근은 선캄브리아기 편마암 계열에 속하는 변성암이며, 남쪽으로 고루포기산과 발왕산 부근은 고생대 평안계 계열의 사암과 셰일로 이루어진 퇴적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화강암은 단단한 암석이지만 일단 절리면을 따라 물과 접촉되면 쉽게 풍화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횡계고원 일대는 겨울철 눈이 많고 여름철 강수량이 많아 화강암의 풍화에 적합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기반암을 이루는 화강암은 비교적 온난다습했던 제3기를 거치면서 오랜 동안 지중에서 심층풍화가 진행되었으며, 이후 제4기의 여러 차례에 걸친 빙하를 거치면서 더욱 심하게 풍화되어 침식과 삭박을 받아 평탄한 지형이 된 것이다.

반면 북쪽에 위치한 오대산 부근의 편마암과 남쪽에 위치한 평안계 퇴적암은 화강암에 비하여 풍화와 침식에 강했기 때문에 횡계고원에 비하여 덜 깎여나가 험준한 산지를 이루게 되었다. 즉 횡계고원 일대를 이루는 화강암이 주변 지역의 암석에 비하여 풍화와 침식에 약하기 때문에 보다 현저하게 침식이 진행되어 저평한 형태의 분지가 된 것이다.

한반도는 중생대 쥐라기와 백악기에 걸쳐 전국 규모의 커다란 지각변동을 겪은 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큰 지각변동 없이 오랜 기간 침탈과 삭박의 지질시대를 거쳤기 때문에 지표면은 준평원 상의 평탄한 지형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신생대 제3기, 약 2천3백만 년 전에 한반도는 다시 한 번 크게 요동치게 된다. 동해가 생겨나면서 그 영향으로 횡압력을 받아 심하게 요곡, 융기하게 된 것이다.

2천3백만 년 전 경동성 요곡운동에 의해 융기

 

이 과정에서 동해지각과 거의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던 한반도 지형면은 습곡과 단층의 영향을 받으며 융기했다. 이때 횡압력을 직접적으로 받은 동해안쪽은 융기량이 많아 급경사를 이루었으나, 서쪽 지역으로 가면서 융기량이 적었기 때문에 경사가 완만한 동고서저의 경동지형을 이루게 된 것이다. 동해와 나란히 평행하게 달리며 솟아오른 낭림산맥과 태백산맥은 바로 이때 생겨났다.그런데 이때 한반도가 솟아오르는 과정에서 과거 평활했던 지형면의 일부가 다른 지역에 비해 습곡의 영향을 덜 받은 가운데 그대로 융기하여 현재의 높은 고도 상에 평탄지로 남게 되었다. 대관령 일대의 횡계고원은 바로 이때 태백산맥이 만들어짐과 동시에 들어올려진 이후 덜 깎여나간 지형면이 현재의 높은 고도에 남은 것이다.현재 태백산맥을 비롯하여 소백산맥 등 전국 곳곳의 약 900m 이상의 산지에 약 300m 내외의 소기복을 이루며 발달해 있는 고위평탄면은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들이다.그런데 고위평탄면은 왜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을 따라 동쪽 산지에 밀집하여 나타나는 것일까? 이는 지반융기의 축이 동쪽으로 치우쳐 있었기 때문으로, 융기량이 컸던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의 내륙 산정부에 준평원의 잔재인 고위평탄면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게 된 것이며, 또 산정부에 원형 그대로의 모습이 잘 보존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남한산성이 위치한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495m) 정상부의 평탄한 지형면 또한 과거의 지형면 일부가 태백산맥 형성 당시 함께 융기한 것으로, 융기축인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에서 멀어질수록 융기량이 적었음을 말해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이곳을 연구 조사했던 청주대학 지리교육과 권순식 교수(지형학)는 “현재 대관령 일대에서 살펴볼 수 있는 지형면은 과거 융기했을 당시 그대로의 지형면은 아니라는 사실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준평원에 달했던 지형면은 융기한 이후에도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침식을 받았기 때문에 지금의 지형이 융기할 당시 그대로의 지형(원지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설명이다. 다만 개석(開析)되고 남아 있는 지형면을 기준삼아 침식되기 이전의 지형으로 연장해보면 약 2천만 년 전의 원지형의 규모를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다.

횡계고원 일대의 고위평탄면에는 남한강 최상류천인 차항천과 송천이 흐르고 있다. 평탄면에서 이 두 하천으로 흘러드는 지류를 따라 평탄면은 오랜 세월 침탈되고 삭박되어 정상부에서 볼 때, 곡(谷)의 깊이는 크게 약 200m 이상 패여 나갔을 정도로 큰 규모다. 따라서 권 교수의 말에 따르면 현재 우리가 고원 상에서 살펴볼 수 있는 지형면들은 바로 개석되고 남아 있는 잔류 지형면으로, 일종의 화석지형(relict form)에 해당된다.

대관령 지역은 해발고도가 높아 여름철에도 기온이 그리 높지 않고 비교적 서늘하다. 또한 백두대간의 중심축을 이루는 태백산맥의 한가운데에 위치하여 연 강수량이 약 1,500mm에 이를 만큼 풍부할 뿐만 아니라, 겨울철 눈이 많기로도 유명한 곳이다. 따라서 강수량이 적은 봄철에도 이곳은 겨울철에 쌓인 눈이 녹아 토양이 수분을 풍부하게 머금고 있어 목초재배에 유리하다.

한국판 ‘사운드 오브 뮤직’, 동양 최대 목초지 들어서

게다가 완만한 경사로 이어지는 구릉지대를 이루고 있어 방목에 유리하고 고산지대여서 모기와 진드기가 없으며, 가축의 먹이가 될 옥수수, 마초(馬草) 등이 잘 자라서 한우와 젖소 사육을 목적으로 현재 삼양목장과 한일목장을 비롯하여 여러 개의 목장이 들어서 있다. 특히 1975년 영동고속도로의 개통과 함께 수도권에 신속하게 신선한 우유를 공급할 수 있게 되자 많은 목장들이 들어왔다.

그러나 최근 식생활 변화에 따른 우유 소비의 감소와 버터, 치즈, 분유 등의 낙농제품 수입으로 인하여 젖소 사육두수는 현저하게 줄어든 상태다. 현재 대관령 삼양목장의 경우 예전 3천 마리에 달했을 만큼 많았던 젖소가 년 현재 유기농으로 300두 정도 사육하고 있다.

도암면 소재지에서 이곳을 관통하여 흐르는 송천을 따라 약 3km 가량 상류로 올라가면 여의도의 7.5배에 달하는 크기의 동양 최대의 목초지라고 할 수 있는 대관령 삼양목장에 이르게 된다. 목장 초지대로 들어서면 한국판 ‘사운드 오브 뮤직’의 한 장면이 떠오를 만큼 광활한 초원 위로 젖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평화로운 광경을 볼 수 있다. 최근 이곳은 한여름철 새로운 고원 피서지 명소로, 영화 촬영지로 각광을 받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횡계고원 일대의 지형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털을 깎아놓은 양 모양으로 자연식생인 삼림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민둥산 모양이다. 대신 그 자리에는 젖소와 한우를 사육하기 위한 목장들이 들어서 있을 뿐만 아니라 무, 배추를 재배하는 고랭지 채소밭이 널려 있다. 1970년대 중반부터 목장이 들어서고 고랭지 농업이 널리 행해지기 시작하면서 울창했던 원시림이 모두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이곳 일대의 원시림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이보다 훨씬 이전인 17세기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원래 이곳은 원시림으로 우거진 삼림지대를 이루고 있었으나,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 조선시대의 사회적 변화의 영향으로 화전민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울창한 거목들이 불태워지고 잘려나가기 시작했다. 화전민들은 귀리, 기장, 조, 옥수수, 콩과 같은 냉량성(冷凉性) 작물들을 재배하며 이곳에 삶의 터전을 마련했고, 19세기에 들어 함경도와 평안도 사람들이 이주해오면서 이들이 가져온 감자가 고랭지 농업의 대표적인 작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나 화전은 1966년 화전정리법이 시행되면서 급격히 감소하고 1970년대 들어서는 완전히 사라졌다.

한편 횡계고원 일대는 황태덕장으로도 잘 알려진 곳이다. 황태는 명태를 한겨울철 산간지역에서 추위와 바람 속에서 건조시킨 것을 말하는데, 이는 한겨울에 횡계고원 일대가 영하 15℃를 오르내릴 정도로 기온이 특별히 낮고 바람이 강하게 부는 곳으로 명태를 말리기에 적합한 기후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 덕장이 시작된 것은 한국전쟁 당시 함흥, 원산, 명천 등지에서 덕장일을 하던 피난민들이 이곳 대관령 지역에 들어오면서부터라고 한다. 기후조건이 그들이 살던 지역과 유사했기 때문에 별 어려움 없이 횡계고원 지역에서 덕장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화전이 사라지면서 화전민들이 대거 덕장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에 횡계고원 지역은 인제의 용대리 덕장과 함께 황태의 고장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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