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이면 소환되는 옛 기억들-

초원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들이 생각나는 8월이다

 

금년은 보기 드문 무더위가 극성을 부리는 8월이다.

나는 초등학교 방학 때면 매년 ‘8.15 광복절기념식을 한다고 학교에 소집되었다. 교장 선생님의 광복절 기념사가 끝나고 만세 삼창 하기까지 뙤약볕에 한참을 서 있어야 했던 괴로운 기억이 떠오른다.

지나고 보면 이런 나쁜 제도는 일본 제국 주의가 남긴 잔재로 보였다.

그러고 보니 나의 일생에서 8월에 대한 좋은 기억은 거의 없는 셈이다.

이글거리는 뙤약볕에 한참 서 있다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나는 논에 가서 김을 매야 했거나 해마다 가뭄이 길어서 웅덩이 물을 두레로 퍼 올려 마른 논에 대야 했던 고통스러운 기억 같은 것 말이다.

나는 일본 사람들이 왜 우리나라를 점령하고 국권을 빼앗은 뒤 우리 고유의 말까지 없애고 일본 식 성으로 바꾸라고 했든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것은 일본인 특유의 한민족에 대한 뿌리 깊은 열등 의식 하에 우리 민족을 영구 지배하고자 한 부질없는 욕심이었다는 판단이 섰다.

나는 매년 8월이 되면 초등학교 5학년 때의 담임이었던 김 아무개교사의 기억이 짓궂게 떠오른다(나는 단호히 그에게 선생님호칭을 붙여주기를 거부한다).

그는 우리에게 기분이 나쁘면, 맨날 우릴 “바가야로(바보)”라 했고

조선 놈들은 사흘 거리 맞아야 정신 차린다라며본때' 보이기로 말 안 듣는 아이들을 앞에 나오게 해서 호되게 각목을 휘둘러 쳐 댔다.

우리의 5학년 동안 내내 그 교사에게 안 맞은 아이가 없을 정도로 매를 가지고 훈육(?)을 하던 그의 입에는 우리를 향해"가야로 같은 조선 놈들”, “ 사대주의, 봉건 주의 사상에 물든 저급한 놈들이라는 말을 끊임없이 해댔다.

그중에 우리가 제일 참기 힘든 기억은 어쩌다 잘못을 범한 두 친구를 마주 세워서서로에게 뺨을 치게 하는 벌을 내렸다두 친구가 서로의 뺨을 치다가 하나가 쓰러질 때까지 강요 해 댔다.

뒤에 우리는 그 교사가 일본인인 줄로 알 정도였다. 알고 보니 그는 반듯한 한국인이며 1950년대 당시 ㅇㅇ사범학교를 졸업한 준재(俊才)였다. 웬일인지 그는 일본인들이 우리 선대에 범했던 악담과 벌주기, 하대하기를 고스란히 우리에게 자행하면서 만족하고 있었다.

아니 일본인 교사들이 우리의 선배들에게 어떻게 훈육하고 대했든지의 표본처럼 박제된 모습 그대로 간직한 이였다.

지금도 그 교사에 대한 뼈저린 기억은 뻘뻘 살아 있고 매년 8월이 되면 일본의 나쁜 관료나 순사의 행태와 데칼코마니를 이루며 새록새록 뚜렷하기만 하다.

괴롭고 힘든 계절, 또다시 8월이다.

우리가 잃었던 나라를 되찾은 광복을 했다고 하지만 우리의 언어 생활은 일본어로부터 광복이 아닌 미 수복 상태에 놓여 있다굳이 일본이 우리에게 남기고 간 찌꺼기 말을 여전히 사용한다는 것은 민족의 수치가 아닐까우리말로 사용해도 될 것을 생각 없이 사용하는 일본어가 수를 셀 수 없게 많은 것이 사실이다. 가령 오뎅[어묵], 유도리[여유, 융통성], 가라[가짜], 앗싸리[아예, 차라리], 벤또[도시락], 쿠사리[핀잔], 데모토[보조공], 같은 것들이다.

이런 언어 환경을 우리 대에서 척결하지 못하고 대를 이어 전해져서는 안 될 일이다. 그동안 흔하게 일어났다가 꺼지는 항일, 극일, 반일 운동보다도 그동안 대수롭지 않게 여겨 온 일본 말 찌꺼기들을 제거하는 것이 더 시급한 일이 아닐까?

그러고 나서 비로소 지속적이고 항구적인 항일, 극일, 반일 운동을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구도를 갖추고 대를 이어 자리 잡게 해 주어야 할 것이다.

8월은 몇십 년 만의 더위가 맹위를 떨치는데 이런 보람 된 일이라도 해야 민족의 앞날이 더욱 밝아질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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