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세가 되어 "고창 서정주문학관"을 방문하고~

나의 상념이 써내려갈제대로 담기길 바란다

마음의 거리와

물리적 거리는 다르겠지만 

전국이 반나절 생활권이라서

불과 21km의 거리는

복분자(覆盆子) 한 병 들고

언제든지 놀러 갈 수 있는

지척지간(咫尺之間)의 

이웃사촌이다. 

아직도 만나지 못하고 있는 

南과 北의 이산가족들처럼

무려 70년 동안이나 

울타리 없는 이웃 집을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면  

무모했거나 무심했거나 

둘 중 하나다.

너무나 유명한 

시인의 생가(生家)는

한달음으로 닿을 수 있는

咫尺임에도 불구하고 

방문하지 못했기에 

더욱 그렇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이하생략>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명시(名詩)로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詩의 진수(眞髓)를 

맛보게 해주었던

미당(未堂)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의 도입부다.

소쩍새의 울음을 통해

고뇌와 시련의 과정,

삶의 깊이를 성찰(省察)하는 

‘국화 옆에서‘처럼 

또 다른 세상이 열리는  

어떤 만남은 

오랜 인고의 시간과 

시공간(視空間)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상호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신산(辛酸)한 과정임을 

새삼 깨닫고 있다.

비가 오락가락하던 

지난 7월12일 

매년 많은 사람들이 

未堂의 시심(詩心)을 

느끼고 간다는 

‘미당시문학관’을 찾아 갔다. 

필자(筆者)의 시골집과 

21km 거리에 있는 

시인의 生家는  

고창군 부안면 질마재로의

바람 잘 날 없는 

북서향의 지형(地形)으로  

병풍처럼 버티고 있는 

소요산 아래의 

바닷가였다.

마을이 가까워지면서부터 

未堂의 주옥같은 詩들이 

두근거리는 가슴 속에서  

스물스물 올라오기 시작했다.  

결코 아스라이 먼 나라의 

시인이 아니었다.

이미 가슴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축축한 장마철의 

눅눅한 습기(濕氣)를 

모두 날려버릴 듯 

내리쬐고 이글거리는 

햇살을 피해 

시인의 문학관 입구 

팽나무 그늘 아래서 

마소(馬牛)의 안장 같은 

우뚝한 산세(山勢)를 살피며 

남다른 詩心을 불태웠던 

청년 시절을 상상했다.

초가지붕의 生家에는 

사극(史劇) 영화 셋트장 같은

두 채의 초가집이 있는데 

입구 사랑채에는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갔더니’로 시작하는 

‘선운사 동구’라는 詩가 있고,

조그만 뜰 안채에는 

‘동지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로 끝나는 

‘동천(冬天)’이 

색인(索引)되어 있다. 

스무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었다는 

시인의 인생 역정에 

실(失)과 오점(汚點)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 시인으로서 未堂은 

수많은 문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을만큼 

스승의 자취로 여전하다. 

‘未堂 서정주 이상으로 

우리 詩의 역사를 

풍성하게 보여준 시인은 

아직 없다‘는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미당은

16세에 습작시(習作詩)로

詩를 쓰기 시작하여

평생 시인(詩人)으로 살았다. 

나이 86세로 졸(卒)했으니 

무려 70년 동안 詩를 쓰며 

장수를 누렸다. 

시인 스스로가 미당(未堂),

아직(未) 마루(堂)에 

오르지 못한 

시인일 뿐이라는 

아호(雅號)를 쓴 것은 

겸손함의 극치(極致)다. 

경외(敬畏)함이 

저절로 솟는다.

아무튼 

서정주 시인의 아호인 

'未堂'의 뜻을 살펴보면

여기서 堂은 

집이 아닌 '마루'를 

구체적으로 가리킨다. 

이와 관련, 

<논어> 선진편에 등장하는 

승당입실(升堂入室)이 있다.

  

자왈(子曰) 

유야승당의 미입어실

(由也升堂矣 未入於室)." 

공자께서는 

유(자로)의 학문은 

당에는 올랐으나 

아직 방에 들어오지 못했을 

따름이다."라고 하셨다. 

어느 분야이든 

학문의 세계에선 

스승에게 배우는 제자가

고수가 되는 과정을 두고, 

升堂入室로 비유하곤 한다. 

스승과 나란히 방(室)에 앉아 

학문을 토론할 수 있는 

내공을 갖춘 제자가 

入室이 허락된다.

하지만 그보다 

약간 미치지 못할 경우엔 

마루에서 

스승의 말을 들어야만 했다. 

다음은 마루 밑에 

마당에서 앉아 듣는 

제자도 있었는데 

이를 보통 

문인(門人)이라고 했다.   

“우리는 미당 선생의 죽음을 

죽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언어는 

이제 바다의 것,

하늘의 것,

우주의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이어령

“미당 문학이야말로 

이 나라의 정신문화의 핵이요.

가장 정채(精彩)있는 예술이요.

가장 절정을 이룬 

보배로운 문화유산이다.“

- 시인 송하선

“미당은 한국어가 살아 있는 한 

죽지 않고 영생할 것이다”

- 문학평론가 홍기삼 

“독재자조차 훔쳐가고 싶었던 

그의 시의 혼“

- 시인 문정희

“미당의 시는 

읽고 낭송하는 순간 

겨레의 음악으로 바뀌어 

우리 숨결 속에 함께 살아간다.”

- 문학평론가 윤재웅 

위의 다섯 사람은 

未堂의 영혼(靈魂)으로부터 

入室이 허락된 사람들이다. 

8할의 바람이 전하는 말이다. 

마음먹기에 따라

멀고도 가까운 이웃사촌,

筆者의 상상(想像)이지만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덜 되어 부족하다’는 

未堂의 ‘만족없는 탐구’의 

 ‘질마재 신화(神話)’가 

사뭇 궁금하여 

불시(不時)에 찾아 갔던 

그날 하루,

시적(詩的)이었고 

참 멋있었다.

 

글 : 본지 발행인, 박영희 동국대학교 행정대학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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