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쓰기에서 드디어 책이 출간되었다. 책이라기에는 초라하지만 나만의 히스토리, 자서전이기에 특별함과 뿌듯함이 함께 한다. A4절반인 국배판이지만 나에겐 소중한 책이다. 거기에 쓰여진 글을 소개해 보기로 한다.

우리집 이야기

​"애들아! 이 집이 우리집이다." 하고 이삿짐 차량에서 내릴 때 우리 네 식구는 환호했다. "아빠! 정말 우리가 살 수 있는 거야?" 하고 안규와 안나가 커다란 눈방울을 굴리며 12층 높이의 아파트를 쳐다보며 기뻐한다.

​아내와 결혼한 지 13년 정도 지난 때쯤 안양 평촌 1기 신도시 부영아파트에 입주했다. 마치 지상의 천국이 나에게 온 것 같아 너무나 기뻤다. 3년 전 아파트가 건설될 안양 평촌으로 사전 답사를 해보니 평촌이란 이름에 걸맞게 넓은 논밭에 여기저기 기반시설을 닦고 있는 중장비만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곳에 과연 아파트가 건설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약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서민들을 위해 분당, 평촌, 일산 3곳에 100만 가구의 1기 신도시를 발표하고 나는 적극적으로 청약저축을 활용해 1차로 31평형에 신청했지만 턱없이 경쟁률이 높아 탈락하고, 2차에 기대를 낮춘 결과 드디어 당첨이 된 결과다.

우리 가정은 아들과 딸을 연년생으로 둔 가족이었지만, 나의 부모는 형제 자매가 10명이나 되는 대가족을 생산하신 부모님 덕분에 나는 분가했을 때 결혼자금이나 사업자금을 받을 상황이 되질 못했다. 지금의 아내와 29세에 결혼하고 처음으로 신혼집으로 선택한 곳이 세곡동 헌인마을 지하실 원룸이었다. 그곳은 완치된 한센병 환우들이 모여 집단생활을 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아들과 딸을 얻었고 가난했지만 행복한 나날이었다.

어느 날 신학을 이수한 동생이 군대에서 제대한 뒤 우리집으로 제수씨와 함께 와선 교회를 설립해야겠다고 하면서 우리집에서 교회창립예배를 시작했고 나는 기쁨으로 동참했으며, 함께 잠실로 이사했다. 동생이 군대에서 삼청교육대생들을 교인으로 받아 본격적으로 개척교회를 시작했으나 동역자들의 의견과 생활조건이 여의치 않아 다시 성수동으로 이사했다. 공동주방을 사용하는 원룸에서 먼저 사신 아주머니의 잔소리를 견디지 못한 아내의 성화로 다른 곳으로 또 이사했다. 노룬산 시장 입구에서 통닭가게를 인수하고 가게에 딸린 방에 네식구가 기거했다.

어느 날 아내의 지인이 야외로 가지고 갈 통닭을 주문헀었는데 통닭을 튀기는 과정에서 아내가 졸고 말았다. 약간 매캐한 냄새를 감지한 나는 가게로 나와보니 이미 통닭통에서 불이 붙고 천장까지 옮아 붙고 있었다. 새벽이라 모두다 잠들고 있을 때였다. 당황한 나는 아내를 깨우고는 물을 끼얹었으나 물과 기름의 성질상 불은 더 크게 옮아 붙었다. 다행히 앞집 세탁소 사장님이 소화기를 가져와 불은 소화되었지만 상반신은 2-3도 화상을 입어 병원에 2주간 입원하고 지금도 영광의 상처를 볼 때마다 가슴이 콩닥거린다. 불소방차가 출동했지만 골목이 좁아 입구까지만 출동했다. 다행히 세탁소 사장님의 지혜로 신속히 불은 진압되었다. 화상치료의 고통을 경험한 나는 화재가 발생하면 무조건 그 장소를 벗어나라고 조언한다. 이후에도 근처 다섯 군데를 전전한 뒤 아파트로 이사했으니 마음은 정말 천국이었다. 아내는 함박웃음으로 기뻐했고, 초등학교 다니던 아들딸도 공부방이 생겨서 더 좋아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 추억을 기억의 창고에서 꺼낸 나는 빙그레 웃고 있다.

 

저작권자 © 시니어 타임스(Senior Time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