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가 학회 참석차 제주도에 왔다. 학회 장소가 제주대학이다. 숙소가 대학 근처의 호텔인데 예약한 한 사람이 집안에 일이 생겨 불참하게 되었다고 그 방에서 하루 묵으면서 얼굴 보자고 한다. 바쁜 사람들 얼굴 보자면 이런 방법도 참 좋다.

​제주대학은 우리 집과 반대쪽이라 그 동네는 통 모른다. 아무래도 은퇴 후에 정착한 곳이라 한창 활동할 시기의 내 무대가 아니었으니 제주도 전역을 샅샅이 알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한라산을 두고 이쪽 저쪽이라 궁금하였던 터다. 초대해 주는 걸 반가워하며 난타호텔을 찾아갔다. 처음부터 호텔이란 면에서 무언가 친숙함도 색다름도 느꼈다. 체크인하면서 건물과 한 마당에 난타 공연장이 있음도 알았다. 난타공연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호텔이었다. 매일 오후 한 차례 90분 공연이며 호텔 투숙하면 반값이라 공연을 보기로 했다.

​시끄럽겠다 하는 생각으로 극장에 들어갔다. 역시 시끄럽긴 했지만 혼란스러운 소리 가운데서도 여전히 숨어있는 소리의 절제가 있고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가운데 등거리로 군데군데 말뚝처럼 이정표처럼 영역 표시가 있다. 이어지는 이야기도 꼭 강조하여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없으나 영역이 말해주는 삶의 변죽 같은 것도 보인다. 하찮은 일상들, 귀찮기만 한 존재하기 위하여 소모해야 하는 수고들, 먹고사는 생활의 단면들이 무대 위에서 출렁거리며 부풀려 만든 소리들이 현실에서 한발 물러선 탓에 신명나게 한다.

​열 살 전후에 동네 동무들과 함께한 소꿉놀이와 거의 정말 같아 그때 생각이 났다. 동무들은 각자 엄마의 부엌에서 가장 작은 냄비에 마늘, 파, 쌀, 된장, 간장을 조금씩 가져왔다. 엄마가 출타한 동무 집에서 우리는 생쌀을 겨우 면한 밥을 짓고 파 마늘 된장 상추 간장 된장을 버무려 김치라고 이름 지었다. 먹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작은 접시에 담아 그럴싸한 밥상을 차렸던 기억이 났다.

​난타 무대는 성인들이 하는 살림살이 뒤풀이다. 자르고 섞고 만지고 치고 만들고 자료들을 한데 합쳐 끓이고 하는 작업들이다. 칼질하고 저장하고 불을 사용하고 청소하고 넘어지고 두드리고 사랑하고 질투하고 숨긴다. 어른들의 단순하고 지겨운 일상을 어린이의 소꿉살림과는 달리 부풀리고 약간 조미료를 가미하고 적당한 시간에 끊고 또 시작하고 하면서 소리는 높게도 낮게도 빠르게 느리게 조절하고 절제한다. 이런 변형들은 나른한 삶들에 활기를 주고 미치게 지겨울 수 있는 시간을 절단하여 생활의 새 연대기를 연다. 새 기분이 나게 한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운을 얻는다. 소꿉놀이는 어른들 모방이 기초가 된 아이들의 미래의 자화상 놀이다. 난타 무대는 성인들이 잠시 일탈하려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자찬하는 자축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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