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를 위한 토요편지 908호

출처 : 문경새재박물관
출처 : 문경새재박물관

삼성을 창업한 고(故) 이병철 회장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다독(多讀)이 아니라 난독(亂讀), 마구잡이로 책을 읽는다. 그런데 그중에서 내가 그나마 제대로 읽은 책은 <논어>였다. 나(我)라는 인간을 형성(形成)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은 바로 <논어(論語)>다.“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한 '삼성'이라는 존재의 뿌리에 論語가 있었던 것이다. 論語를 이야기하면 누구나 한 마디 쯤은 거든다. 그만큼 많이 알려져 있고 대부분 사람들이 읽었다. 그러나 초(超) 베스트셀러 ‘마이클 샌들’의 '정의란 무엇일까?'처럼 책꽂이 장식용(裝飾用)인 경우가 적지 않다. 학이편의 학(學)부터 요왈편의 지인(知人)까지 論語 20편을 깊이 묵상(黙想)하며 삶에 적용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筆者도 어린 시절부터 저자(著者)가 다른 論語를 10여권 탐독(耽讀)했지만 몇 구절을 제외하고는 아직까지도 공자(孔子)의 인(仁), 그리고 충(忠)과 서(恕)라는 삶의 철학과 메시지를 명확하게 해석할 수가 없다. 솔직히 말한다면 글자의 자구(字句)나 멋스러운 소소한 맥락에 구애(拘碍)를 받았거나 형식에 빠진 논어 읽기였다. 이른바 글자에 덫에 걸린 것이다. 孔子께서 살아 계시다면 회초리를 들 것만 같은 상상으로 오금을 조릴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지금도 여전히 양파껍질을 벗기듯이 매일 한 꼭지씩이라도 읽거나 쓰는 이유다. 나를 형성한 것이 ‘논어‘라고 할 만큼의 인생 최애(最愛)의 책으로 제대로 읽고 싶은 마음이 6월의 하늘만큼 뜨겁다.

​뒤늦게 알게되었지만 論語 한 줄이라도 인용(引用)하는 사람들이 사표(師表)로 삼는 ‘반부논어(半部論語)’라는 고사성어(故事成語)가 있다. 송(宋)나라 조광윤을 도와 천하를 통일하는데 큰 공을 세운 '조보(趙普)'의 이야기다. 趙普는 어릴 때부터 전쟁터를 자주 드나들었던 무인(武人)으로 글공부를 할 틈이 없었기에 학문에 몹시 어두웠다. 그는 이를 염려하여 삼국지의 여몽(呂蒙)처럼 전쟁터 막사에서도 열심히 글을 읽어 많은 학식을 갖추게 되었다. 태조가 죽고 태종이 즉위한 뒤에도 승상(丞相)으로 재임용되었는데, 질투 시기하는 사람들이 그를 몰아내기 위해 "그는 전쟁터에 나가느라 겨우 ‘論語‘ 밖에 읽지 못해서 중책을 맡기기 어렵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소문을 들은 태종이 그를 불러 넌지시 묻자 趙普는 차분하게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신(臣)이 평생에 아는 바는 진실로 論語를 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半’ 권의 지식으로 창업(創業)의 시기, 즉 태조께서 천하를 평정하시는 것을 보필하였고, 수성(守成)의 시기, 지금은 그 나머지 ‘半’으로 폐하께서 태평성대를 이룩하시는데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명재상(名宰相)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趙普의 의미심장한 대답이었다. 가당치는 않지만 孔子가 옆에 있었다면 체면 불구하고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었을 것이다.

​趙普가 죽은 뒤 가족이 유품을 정리하다가 그의 책 상자를 열어 보니, 신기하게도 論語만 있었다고 한다.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오로지 論語만을 항상 곁에 두고 읽고 있었다는 말이다. 趙普의 인생 책은 論語였다. ‘半部論語’는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반 권의 論語’이지만 의역(意譯)한다면 ‘자신의 지식을 겸손하게 이르거나 배움(學)의 중요함‘을 비유(比喩)하는 멋진 말이다. '半部論語'는 '반부논어치천하(半部論語治天下)' 라고도 하는데, 반 권의 論語로 천하를 다스린다는 것이다. 論語의 가르침은 온고지신(溫故知新)을 훌쩍 뛰어 넘는 그 무엇, 실로 어마어마한 책이다. 송나라 유학자 정자(程子)는 이런 말을 했다. ‘論語를 읽고 나서도 아무런 변화(變化)가 없는 사람이 있고, 한 두 구절을 읽고 기뻐하는 사람이 있다. 모두 다 읽고 나서 곧바로 자기도 모르게 손을 덩실덩실 흔들고 발로는 스텝을 밟는 수무족도(手舞足蹈)하는 사람도 있다. ‘手舞足蹈’는 그냥 읽은 사람이 아니라 책을 체득하여 그 깨달음을 온 몸으로 느끼는 사람이다. 이것이 바로 득의망형(得意忘形)이다. 무엇인가 얻었는데, 형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온 몸을 통해서 온 정신을 통해서 얻은 것이다.

​다산(茶山)은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서 ‘수천 년을 견뎌온 고전은 평생을 머리맡에 두고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면서 “유논어가이종신독(唯論語可以終身讀) <論語>만큼은 평생 읽기를 바란다.“고 후학(後學)들에게 강추했다. 인생 공부한답시고 틈나는대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논어를 붙잡고 씨름했지만 아직까지도 선독(善讀)의 엑스터시(exstasy)를 통한 깨달음의 手舞足蹈에 단 한 번도 이르지 못했고, 실제 아는 것이라곤 겨우 ‘半部論語’에 불과할 뿐이니, 허송(虛送)한 세월(歲月)에게 그저 미안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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