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갑자인 이모와 두살 아래인 이모가 있다. 갑자인 이모는 어려서부터 친구처럼 지냈고, 두살 아래 이모는 예의가 깍듯한 순 서울토박이답게 조카지만 내가 자기보다 나이 위라고 꼭 씨자를 붙여서 이름을 부른다. 선희씨! 라고....성인이 된 조카들한테도 꼭 조카님이라 부른다.

아버지쪽은 물론 친정엄마쪽도 서울 종로구 인사동 출신이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도 서울 종로구 출신이다. 외할아버지는 11남매의 장자이고 식구는 직계만 모두 7남매로 4대가 합치면 그 수가 어마어마하다. 그 중 제일 맏이가 우리 친정엄마다. 친정엄마 북망산에 가신 지 수십 년이 흘러 한동안 외갓집과의 왕래도 없고 소식이 뜸하던 차, 실로 오랜만에 조카 결혼식이 있어 친정식구가 한데 모였다. 아니 내가 일부러 간 것이다. 새 신부인 조카 며느리는 시댁 식구 숫자에 아마 놀랐을 것이다.

그 중에서 ​나에게 가장 반가운 친척은 대구에서 온 두 이모였다. 두 분은 경상도 사나이한테 시집을 가서 당신들 말로 시골 촌년이 됐다고 한다. 온 김에 우리집에서 며칠 묵고 가라했더니 겨우 이틀 묵고 갔다. 갑자 이모에겐 남편이 82세로 건재하시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삶을 산 지 몇 년 됐지만 그래도 아내의 책임을 해야한다며 부득불 귀가를 고집하셨다.

​천신만고와 기고만장의 세월을 오디오 연속극처럼 때론 다큐드라마의 나레이터처럼 유창하고 재미있게 엮어서 들려 주었다. 과거로 현재로 종횡무진 타임머신을 오작동시키며 너무 웃겨서 요절복통 밤을 새웠다. 용돈 모아 할머니 선물 사준 손녀 이야기 했다가 내 딸이 최고! 하며 돛대 위 갈매기처럼 의기양양한 사돈 이야기에서 다시 소싯적으로 곤두박질을 쳐댔다.

​슬픈 역사도 아름다운 추억이라고 눈물 찔끔, 지금은 늙는 게 아쉬울 정도로 모두 꽃길을 걷고 있다. 앞으로 살 날이 얼마 없으니 건강할 때 자주 만나자고 굳게 다짐하며 헤어졌다.

​친구같은 이모들이니 실수해도 너그럽게 용서해 주고, 무얼 대접하나 고민 안해도 되고, 잠자리 불편할텐데도 오히려 마음이 편해서 잠깐 동안 눈 붙였지만 푸욱 잘 잤다고 하니 감사하다. 언제든지 놀러 오라니, 갈 데가 생겨서 좋다. 지하철역까지 배웅하고 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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