뜰에 첫서리가 내려 국화가 지기 전에

​아버지는 문에 창호지를 새로 바르셨다

​그런 날, 뜰 앞에 서서 꽃을 바라보는 아버지는

​일년 중 가장 흐뭇한 표정을 하고 계셨다

​아버지는 그해의 가장 좋은 국화꽃을 따서

​창호지와 함께 바르시곤

문을 양지바른 담벼락에 기대어놓으셨다

(박형준의 '가을이 올 때' 중에서)

박형준의 이 시에서는 아버지가 창호지 문을 바르셨는데, 우리 집에서는 어머니가 하셨다. 하루하루 광주리장사 아니면 이웃집 빨래나 김장 등의 중노동을 하며 살았어도 어머니는 낭만을 잃지 않으셨다. 가을이 되면 여섯 아이로 인해 너덜너덜해진 창호지 문을 다시 바르셨다. 낡은 창호지에 물을 묻혀 떼어내시고 말린 후 밀가루 풀을 쑤어 새 창호지를 문틀에 맞춰서 붙이셨다. 그때 창호지 사이에 코스모스와 국화꽃을 펴서 넣은 후 그곳에만 창호지를 겹쳐서 붙여주셨다. 새 창호지를 붙이는 날의 산뜻함이 지금도 남아있다. 새 창호지를 바른 날은 왠지 잠이 더 잘 왔던 것같다.

​이른 봄에는 어디선가 얻어오신 다알리아 구근 몇 개를 손에 쥐고 활짝 웃으시던 어머니였다. 탑동에서도 가장 허름한 집에 세들어 살면서도 꽃을 심는 것을 잊지 않으시던 어머니였다. 이웃집 아줌마들이 가지나 상추를 심을 것을 권유하셔도 어머니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봄부터 다알리아, 상사화, 채송화, 사루비아, 분꽃, 코스모스, 국화꽃 등의 꽃을 피워 내셨다.

​어머니는 여필종부를 신봉하였다. 말년의 아버지가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시자 어머니의 신은 하루아침에 부처님에서 하나님으로 바뀌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시주를 부탁하는 스님들을 외면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스님의 목탁소리에 맞춰서 하는 염불소리 듣기를 즐기셨다. 한참 염불소리를 즐긴 후 시주 주머니에 쌀을 한 되박은 넣어주셨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내게 어머니는 웃으며 말씀하셨다. "스님의 염불소리가 듣기좋아서..." 그제서야 알았다. 이왕에 시주할 거라면 빨리 드리지 왜 저렇게 뜸을 들이시나 의아해하던 내 궁금증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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