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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춥다. 한파로 꽁꽁 언 땅에 턱없이 오른 채소값을 다룬 신문은 마음을 더욱 시리게 한다. 연배가 높으신 어른께서 전화를 주셨다. 가까운 분들과 함께 자리를 마련하고파 연락을 한다고 하셨다. 도착한 식당에서는 낯익은 분들이 반겨주셨다. 좋은 일이 있으시냐고 묻는 내게 "좋은 일이지요." 통화하실 때 음성처럼 밝은 음성에 여전히 단정하신 모습이 보기 좋았다. 안쪽에 앉으신 친구분이 혹시 생신이 아닌가 물으시니 웃으시며 그렇다고 하신다. 난 슬며시 일어나 나와 매니저에게 케이크 하나를 주문해 들여 달라고 부탁했다. 은퇴도 진작에 하셨으나 현역에 계신 누구보다도 바쁘게 전국구로 다니시며 강연도 하시고 봉사도 하시는 분이시다.

​그곳에 모이신 분들은 젊은 날부터 함께 얼굴을 맞대고 지내온 분들이니 나누는 대화도 격의없이 편하게 주고받으셨다. 그리곤 모두들 많이 웃으셨다. 연륜이 느껴지는 웃음 속엔 점잖은 것과는 다른 평온함이 묻어 있었다. 요란한 수레바퀴로 웃는 나와는 달랐다. 진작 고희를 넘기신 분들 앞에서 그날은 나도 조용히 입을 가리며 웃었다. 송 교수님은 식사 중 근래 영화관에서 상영되고 있는 영화를 보았느냐고 물으시니 아무도 대꾸를 안 하신다. 그분은 답답해하시며 나이가 들어도 영화를 보아야 한다며 이런저런 방법으로 저렴하게도 볼 수 있다고 설명하신다. 덧붙여 말씀하시길 친구분 12명으로 시작한 모임은 이제 7명으로 줄었고 귀가 잘 안 들리는 분들도 많고 다리가 아파 모임에 참석 못하는 분들이 있단다. 한 번은 문자로 메시지 보내는 방법을 알려준 후 다음 모임을 문자로 전했더니 문자로 답을 보낸 분은 두 분이고 나머지는 급한 마음에 전화로 소식을 전해왔더란다. 저녁에 잠자리에 드는 것은 죽음에 대한 연습이고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은 삶에 대한 연습이니 하루를 마칠 때나 시작할 때나 감사함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셨다. 걸을 수 있음이 감사하고. 내일은 못 볼 수도 있는 분들과 한 번씩 모여지는 대로 만나서 식사를 하고 정담을 나누면 족하지 않겠느냐고 말씀을 맺으셨다.

그날은 50년도 전에 사랑을 약속한 사모님과의 결혼기념일이라고 하셨다. '그랬구나. 보고 싶으셨구나. 그리우셨구나. 사모님과 가까웠던 분들을 모시고 사모님을 만나고 싶으셨구나.' 평소에도 멋진 분으로 늘 생각하던 터였다. 가슴이 아렸다. 그날은 좋은 날이고 생신처럼 기억해야만 하는 날이었다.

​나무 이야기가 있다. 젖어서도 자작자작 소리내며 타들어 간다는 자작나무 이야기다. 북유럽이나 만주 아니면 백두산에 많다는 나무, 이젠 강원도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자작나무는 그 하얀 수피를 벗겨 그 위에 연정의 편지를 써서 보내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루지 못할 사랑일수록 자작나무에 쓴 편지가 힘을 발휘한다고 한다. 나는 이 겨울 하얀 속살을 드러낸 채 하늘로 뻗어 있는 자작나무를 그분에게 구해다가 하늘로 편지를 띄우도록 돕고 싶었다. 자작나무는 힘든 사랑일수록 이루어진다고 했으니 진한 그리움을 개어서 사랑의 시를 써 올리면 오늘 밤 꿈에서라도 손잡을 수 있지 않을까? 춥다고, 세상사가 힘들다고 불평할 이유가 없다. 살아있는 기적을 누리는 것이 오늘의 행복이다. 아리고도 따스한 사랑의 온기를 먹먹한 가슴에 담고 돌아오던 2013년 1월의 그날은 세상에서 가장 멋진 결혼기념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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