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등에 빨간 불이 켜진다. 잠시 멈춰있는 차들을 바라본다. 모두 어디를 가는 것일까? 햇볕이 지치지 않는 캘리포니아에도 겨울은 있지만 때가 되니 밤 사이 꽃망울을 터뜨리며 봄이 오는 소리가 이곳 저곳에서 들린다.

나는 2시간 후에 이 자리에서 만나기로 한 남편과 딸을 기다리며 공원에 앉아 있다. 성조기 휘날리는 잔디 위에 봄 나들이를 나온 듯 유모차를 끌고 와 아기에게 과자를 건네주는 엄마가 보인다. 노랑 곱슬머리가 귀여운 사내아이와 분홍빛 안경을 쓴 여자아이가 다리를 뻗고 앉아 하늘을 쳐다보는 동양 여자가 신기한 듯 쳐다본다. 내가 웃어주자 깊고 맑은 눈에 가득 미소를 물고 부끄러운 듯 되돌아간다. 젊은 두 엄마의 비교적 빠르고 높은 톤으로 이어지는 수다가 달리는 차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아, 난 이태리어를 알아듣지 못한다.

​마스크를 쓴 식당의 종업원은 잔디를 가로질러 나처럼 편한 자세로 앉아 기다리던 댓 명의 젊은이에게 음식을 전해주고 떠난다. 그녀도 일이 끝나면 자리에 앉아 팁을 주며 음식을 시키고 쉼을 갖을 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일하는 시간에 이렇게 햇볕을 온 몸과 마음으로 담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소중한 순간인가. 조금 과한 체중인 나이지만 지금은 햇빛을 받을 수 있는 면적이 좀 더 많았으면 좋겠다.

​바로 앞엔 곁에 놓여진 배낭에 분명히 책 서너 권은 담았을 은발의 숏커트를 한 중년 여인이 한 시간이 넘도록 노트북을 앞에 놓고 내 쪽에선 보이지 않는 상대와 계속 이야기를 하며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한다. 아마 나와 남편의 약속된 만남도 비슷한 상황이리라. 답답한 사무실이 아니고 커피숍의 공기보다 1000배는 좋을 공원의 인터뷰라고 혼자 짐작한다. 대각선 방향으로 서서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배꼽이 나온 채로 전화를 하고 있는 여자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그리고 어젯밤 Walnut Creek에 살고, 내겐 생면부지인 교포가 외로워 운다는 말을 전해듣고 일찍 돌아간 조카를 생각한다. 나는 그이가 짧은 만남의 시간이지만 위로받고 회복이 되었으면 좋겠다. 문득 그이에게 좋은 친구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친구같은 아내, 친구같은 남편, 자매, 자식, 소중한 오래된 친구들을 갖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놓아버린 기회요. 어려운 일이다. 인간은 외롭다. 그래도 우린 살아내야만 한다. 어차피 가야할 길이라면 외롭지 않게 서로에게 기댈 나무가 필요하다. 나 또한 턱없이 부족하지만 누군가에게 쉼이 되고 웃음을 줄 수 있는 의자가 되고 싶다. 이만큼 오는 동안 삶의 기둥이 되고 벗이 되어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를 보낸다. 소중한 인연의 줄로 맺어진 몇 분들은 이미 이 세상을 마감하셨다.

​저기 한 쪽 귀퉁이에서 아기를 서로 번갈아 안아주며 햇살을 즐기던 부부가 먼저 이곳을 떠난다. 아마 아기를 잠 재울 시간인가 보다. 문득 손주가 생각난다. 늘 오후에 잠자는 시간을 놓치면 보채곤 했는데 오늘은 어땠는지 궁금해진다. 추운 곳에 있는 손주에게 띠스하고 포근한 햇살 한 조각 조각보에 담아 서둘러 보내고 싶다. 방금 내 옆으로 한 여인이 미소지으며 돗자리를 들고와 책을 읽기 시작한다. 푸른색의 돗자리가 그녀의 검정 운동복과 잘 어울린다. 저 여인은 어떤 책을 읽을까 궁금하다. 나도 슬쩍 내 가방에 담겨있는 Word Search를 집어든다. 남들을 둘러보기도 조금 지치고 기다림의 시간이 남아있으니 여유로운 단어찾기의 여행 또한 나쁘지 않으리라.

​잠시 후 WholeFood에서 샐러드감을 사고 스파게티와 와인을 곁들인 저녁 식탁을 마련할 계획인 딸을 만날 것이다. 아름다운 하늘이 펼쳐진 이곳, 악마(디아블로)의 블로바드에서 여행 중 눈에 비친 천사들을 보고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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