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처 사진

선물은 선물이기에 받아서 기쁘고 행복한 시절이 있었다. 선물은 받기보다 주는 게 더 큰 기쁨과 보람인 시절도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선물이란 대개 주고받으니 주었다면 받기도 했을 테니까 준다는 건 받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선물의 의미가 더 많이 복잡 미묘해진 건 넘쳐나는 물건들의 세상이 온 후부터다.

나이 꽉 찬 처녀 총각에게 하는 인사가 국수 언제주려나 였는데 그 국수도 답례란 이름의 선물로 변했으니 선물의 내역도 챙기자면 꽤나 많아 한 두 쪽의 종이는 소비하지 싶다. 요즘은 정부기관의 행사에도 오밀조밀 실생활에 필요한 작은 선물이 자주 따라온다. 다른 작은 단체의 행사에도 참석해 보면 귀여운 선물들이 참석의 기쁨을 더하게도 한다. 그래서 선물은 이제 하나의 생활의 기교이기도 하겠다. 예산에 맞추어야 하고 참석하는 인원을 생각하여야 하고 제한된 예산으로 모두에게 골고루 나누려면 그리 쉽게 아이템이 정해지지는 못할 것이다. 또 주최 측의 욕심에 행사의 특성도 살리고 받는 사람들에게 더 뚜렷한 인상도 남겨야 할 테니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이런 사회의 일원으로 기르기 위하여서인가 학교나 다른 모든 어린이 모임에서는 이름 있는 날에는 부모나 조부모 형제 친구들에게 선물하는 걸 가르친다. 우리 아들 며느리도 어려서부터 자녀들에게 선물의 의미를 가르치려 했다. 유치원 때부터 그저 1불 내외의 어린아이들의 적은 용돈으로 살만한 물건들로 선물을 했다. 어머니날, 크리스마스, 내 생일만 해도 일 년에 세 번은 아이들이 도토리같은 작은 것들, 보기만 이쁜 것들을 선물했다. 처음에는 손자에게서 받는 선물이라 무조건 흥분하여 세상에 드문 희귀 금속이라도 선물 받은 것처럼 목에 달고 다니기도 팔목에 찰랑거리며 다니기도 했다. 내 방 벽에 걸고 세워두고 달아두고 모든 걸 잘 보일 수 있게 전시했다. 플라스틱 펜던트도 있고 은색의 팔찌도 있고 할머니 감사합니다란 시를 새긴 액자도 있다.

​그 후로는 저희들이 클래스에서 만든 작품들이 쏟아진다. 그림도 있고 공작품도 있고 조개껍질에 그린 그림도 있다. 도자기도 있다. 이런 것들까지 전시하자니 이젠 내가 사용하는 공간이 가득 차버렸다. 버려야 할 때가 왔다. 벌써 몇 해 전부터 일부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내 손자들이 준 건데 하면서 쉽게 행동화 하지를 못했다. ​이제 중고생을 거치면서 제대로 작품의 면모를 갖춘 것들도 많다. 그것들만 보관하고 저학년 때 준 조잡한 물건들은 버려야지 하면서도 하루하루 미루고 있는데 청소를 하면서 한 개를 그만 깨뜨렸다. 깨진 물건을 보니 이건 버리는 게 맞다 하는 결론이 아주 쉽게 나온다. 손자의 선물을 버리는 데 내 마음에 아무 부담이 없다. 아, 드디어 손자들이 준 선물을 버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 하면서 나는 그동안 열심히 구실을 찾아 시간을 보내었다. 버리고 채우고 그래서 움직이고 바뀌고 변화하고 발전하고 성장하는 것을....

'손자들의 고사리손도 곧 장정의 억센 악력으로 성장하여 큰돈도 벌고 큼직한 선물도 할 수 있어야 하잖아'라면서 나 혼자 중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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