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를 위한 토요편지 904호

20세기에 쓰여진 '시'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손꼽히는 '황무지'의 작가 T.S 엘리엇은 4월을 '잔인한 달'이라는 어두운 옷을 입혔다. 역동적인 봄과 전쟁(1차 세계대전)과의 부조화(不調和)를 상징적으로 수식(修飾)한 것이라 생각되지만, 새로운 봄을 디자인하는 4월의 입장에서는 못마땅한 옷이다.

​12개월의 순환, 그 통과의례(通過儀禮)에 불과한 5월임에도 불구하고 '계절의 여왕'으로 초고속 승진(昇進)시키는 디딤돌이 되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공짜가 없듯이 억울한 4월의 희망고문으로 화사한 5월을 창조해냈다. 픽션(fiction)이나 상상(想像)이 그렇다 해도 수필가 피천득의 시(詩) '오월'이 없었다면 '계절의 여왕'이라는 진(眞)의 자리(席)까지는 오르지(昇)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월'의 詩를 읊지 않고 계절이라는 여왕의 옷깃에 어찌 닿을 수 있겠는가.

​오월/피천득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 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있는 비취가락지이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서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 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몇 번을 읊어도 질리거나 물리지 않는 집밥처럼 맛있는 詩句가 더할 나위 없이 싱그럽고 달큼하다. 여왕의 옷깃에 닿을 만큼 詩를 읊다 보면 마침내 땅 위에 가득 찬 5월이 筆者의 것이 된다. 호사(好事)다. 부귀(富貴)도 선향(仙鄕)도 도대체 부럽지가 않기에 지금 여기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다행이고 삶이 고맙다. "연한 녹색(綠色)은 온 세상으로 나날이 번져가고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피천득 시인은 오월의 연둣빛 신록(新綠)을 예찬(禮讚)하고 있지만, "내 나이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 짐짓 인생의 멋과 맛을 찬미(讚美)하고 있는 것이다. 속세(俗世)를 벗어난 신선(神仙)의 경지(境地)라서 부럽다.

​6월의 원숙한 여인을 기다리는 오월 속에 있을지라도 詩를 독백(獨白)하며 이렇듯 좋을 순 없다는 것을 말(言)과 글(書)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기에 일종의 관음(觀淫)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결국 筆者의 인생 이야기를 포장하는 것이다. 구름이 흘러가 듯 계절이 오고 가는 것도 무감각하고 꽃이 피거나 지거나 그닥 친숙(親熟)하지 못한 나이가 되었지만 바라볼수록 눈부신 연녹색은 왠지 싫지가 않다. 분주했던 마음의 여유가 나이테만큼 더 생겼기 때문일까. 오늘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사랑할 만한 날이다. 거기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정연복 시인은 계절의 여왕 5월에게 시적(詩的)으로 부탁했다. "그대를 계절의 여왕으로 만드는 것은 꽃들이 아니라 연둣빛 이파리들입니다. 선물하는 연둣빛으로 해마다 우리 곁에 찾아오는 5월이여 영원무궁토록 우리를 기억하소서." 연둣빛 프로포즈 너무나 인간적이고 감상적인 시인의 정서(情緖)가 봄비처럼 내린다. 신록의 숲으로 바람 불어도 좋은 토요일, 연둣빛 저고리를 잡아당기며 패션(fashion)의 경계가 없는 간절기(間節氣)의 애매한 옷을 벗어 던지고 계절의 여왕을 품는다. 에두르지 않아도 거부하지 않는 五月이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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