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를 위한 토요편지 900호

“방금 떠올랐던 생각, 귓전을 스쳐간 소리, 혀끝에 감돌던 한 마디, 그것이 과연 무엇이던가. 바로 그것을 어떻게 되살려낼까 궁리(窮理)하다가 평생을 보낸 사람“

​김광규 시집 '그저께 보낸 메일' 32쪽에 나오는 시(詩)의 일부다. 평생까지는 아닐지라도 편지 쓸 사연을 窮理하다가 900호를 맞이하였다. 참 별일이다. 어젯밤 꿈에 899호까지의 편지들이 나비처럼 날아다녔다. 2,400년 전에 살았던 철학자 장자(莊子)의 선몽(仙夢)이 아니라 무지몽매(無知蒙昧)한 필자의 춘몽(春夢)이었기에 사실적이다.

​조고각하(照顧脚下), 자신의 발밑을 살펴보듯이 되돌아보면 글 쓴다는 것에 어떤 목표나 뭔가를 취(取)하려는 의도(意圖)는 없었지만 편지를 쓰지 않았다면 내 인생의 시시한 의미 밖에 존재하지 않았으리라는 것.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그 무엇인가에 중독(中毒)된 것처럼 쉼 없이 계속 써 왔다는 것, 기초가 없었던 필자에게는 지난(至難)한 일이었지만 어려움의 의미를 알았기에 호사(好事)였다. 질(質)의 선악(善惡)을 압도하는 양(量)의 승리다. 꿀벌은 자신의 몸통에 비해 날개가 너무 작아서 원래는 제대로 날 수 없는 구조(構造)를 지녔다고 한다. 그러나 꿀벌은 스스로 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당연히 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열심히 날갯짓을 함으로써 정말로 날 수 있다는 것이다. 장영희씨 수필에서 읽었다. 결코 짧지 않은 17년 3개월의 토요편지는 무지(無知)한 꿀벌을 닮았다. 날 수 없다는 태생적 한계를 모른 채 무모(無謀)한 날갯짓으로 험준한 900호 능선(稜線)에 오른(登) 것이다. 글재주라는 날개도 없으면서 착각의 날갯짓을 시작한 무식한 용기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자화자찬(自畵自讚)도 부끄럽지 않다. 이 또한 별일이다.

​못 한다고 아예 시작도 안하고, 글을 잘 모른다고 날갯짓을 포기했다면 여기까지 불가능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편지를 쓰고 지우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등 시작은 지나치게 예민하고 결말은 어이없이 관대하거나 용두사미(龍頭蛇尾)였다. 쓰기 전에 심원위로(心源爲爐), 먼저 마음을 달구고 窮理의 불을 지펴야했다. 토요일 다음 날부터 벅찬 숙제처럼 느껴졌지만 세상을 크게 또는 작게 들여다보는 유익한 시간을 얻기도 했다. 그저 똑똑하고 학식이 풍부해 보이기 위해 미사여구(美辭麗句)로 수작(酬酌)을 부리는 등 筆者의 어리석은 모습도 스스로 깨달으면서 인생을 배웠다. 자기 연민(憐憫)이나 자아 비대(肥大)는 없었지만 편지 쓸 때마다 스스로에게는 정직하려고 노력했으며 조금씩 달라지는 자신을 직시(直視)하며 용감하게 쓰고 또 썼다. 늘 부족하게 느껴져도 筆者의 수준이 거기까지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위적(自衛的) 판단이라서 쑥쓰럽기는 해도 지극한 참회(懺悔)의 순간에 왜 눈물이 나는 걸까. 참 별일이다.

​평범한 사람이 무언가 지속적으로 노력해서 ‘성장‘이라는 걸 하려면 자신에게 관대해져야 한다. 그리하면 재미도 있다. 단언컨대 재미가 있어야 계속할 수가 있다. 언제 써 질지 모르니 불안해서 미리 쓰고, 앞으로 쓸 수 없을 것이라는 예감에 시달리니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간절함과 절실함은 자신이 가진 능력을 증폭(增幅)시키는 힘이 있다. 어쩌다 지인(知人)들로부터 칭찬의 댓글이라도 있으면 기분이 좋다. 매주의 토요편지가 사실 그렇게 칭찬받을 만한 내용이 아니라는 건 筆者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스스로 관대해지는 데는 칭찬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칭찬을 적극적으로 수집한다. 그러므로 칭찬의 댓글이 없고 모두가 침묵할 때는 “바쁜 중에도 뭔가를 쓰고 있네? 잘하고 있다.”라며 스스로를 칭찬한다. 누군가 혀를 차며 별일이라고 비난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살아 있는 한 사랑과 인생을 배우고 힘든 누군가를 위로하는 그 무엇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그 순간이 筆者를 살게 하므로 편지를 쓴다는 행위는 ‘삶’이고 '놀이'였다. '편지호(便紙乎)! 편지여! 오여여동귀(吾與汝同行). 나는 너와 동행할 것이므로 생유시(生由是), 살아도 너 때문이오, 사유시(死由是). 죽어도 너 때문이라.' 삶의 많은 부분이 이런 힘에 의해 움직인다. 갈 데까지 가리라는 무모한 의욕(意慾) 때문에 길을 잃을 수도 있었지만 인생길을 가르쳐준 편지가 筆者 운명의 짝꿍이었다. 고백하자면 수덕(修德)과 수기(修己)의 마음공부가 부족한 筆者는 늘 엉성한 사람이었다. 그런 것들이 성가실 정도로 많았다. 주제 파악을 못한 筆者의 우둔함을 몰랐다. 토요편지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그러나 이제는 몹시 불만족스러운 筆者의 성가신 일들을 심히 귀찮아 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꿀벌의 날갯짓으로 20년(통산1040호)이라는,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언덕까지 날아 오르고 싶다.

편지 쓰기는 내면의 목소리를 옮겨 적는 받아쓰기에 불과하므로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일 것이다. 여전히 책을 읽으며 좋은 글들의 작법(作法)이나 창작의 비밀 같은 것을 찾고 공부하고 질문하는 일이, 원고지(原稿紙)를 버리고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는 일이 그럴 듯하게 보일 때까지 별일들을 경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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