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왔습니다. 분명 내가 기다리긴 했지만 겨우내 봄의 따스함이 내 생명일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하긴 하였습니다. 특별히 빨리 와달라고 특별한 날에 꼭 와 달라고 초청장을 보낸 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화려한 모습으로 나타나서는 거추장 스러운 겨울옷들을 벗겨버리고 야윈 뺨에 햇빛을 듬뿍 받아보라고 채근을 합니다. 오만가지 꽃들도 아마 봄의 극성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내 정원에서 나풀거리나 봅니다.

​봄날 나들이는 처녀들의 마음이라지요? 처녀는 아니지만 저도 1박 2일 나들이 했습니다. 오우가, 어부사시사 등 시조 75수와 다른 많은 작품을 남긴 윤선도의 고택을 찾아 보았습니다. 알고 보니 이 분은 문학 뿐 아니라 음악에도 조예가 깊고 의약, 풍수에도 깊은 지식이 있었으니 신은 재능 분배에는 확실히 공평하지 못한 듯 합니다. 조선의 사회제도가 선비 중심의 사대부정치체제라 그랬겠지만 이런 분이 정치를 하시면서 귀양, 탄핵,  휴직 등으로 자의든 타의든 바람도 많이 타셨다고 합니다. 문학으로 더 큰 걸 이룰 수도 있었는데 정치하신 건 시간 낭비였으니 아깝다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해설하신 분이 고산은 이조판 이건희 버전 (version)이라는 설명입니다. 그는 부유한 양부와 생부의 유산으로 자산가이면서도 진도에서 간척사업으로 얻은 자산도 있어 거부였답니다. 그 부로 5천여 점의 유물을 콜렉션 했다고 합니다. 저는 문득 이건희 콜렉션을 보고 싶어 몸을 옹송거렸습니다. 이번 방문에는 유물전시장이 공사 중이라 고산콜렉션마저도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날아가 버렸습니다.

​역시 풍수를 아시는 분들은 모두 그런 위치에 자택을 마련하나 봅니다. 해남 덕음산의 산그림자를 지붕이 고스란히 받고 있었습니다. 덕음산의 웅기가 집을 한 치 물샐 틈 없이 포근히 그리고 단단하게 감싸고 있었습니다. 산 입구에는 비자림이 울울창창이었습니다. 키 큰 비자나무가 거구의 파수꾼처럼 모든 악이나 외침이란 감히 생각도 말라는 경고장을 날렸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 비자림은 천년기념물 241호, 국가의 기념물이 개인 소유였고 한 가문의 자산이니 그 엄청난 소유가 순간으로 저를 뜨악하게 만들었습니다. 거인국의 사람과 소인국의 사람이 마주 볼 수 없다는 건 섭섭했습니다.

​1587년생인 고산은 1609년에는 양모가 돌아가시고 1612년에는 생모가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고산이 22세 때 일 겁니다. 두 분 다 3년 시무를 하였다니 효자이기도 합니다만 젊은 천재가 6년씩 재능을 어디다 묻어두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 시절에는 병역의무로 한참 생산할 나이에 때 3년씩 썪힌다고 안타까워도 했는데 옛 시절에도 이렇게 청년의 3년이 흘러가기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길도에는 고산의 정자가 있고 세연정이 있어 참 아름답다고 하는데 워낙 짧은 일정이라 보길도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 곳이 바다 풍경과 함께 남해안 최고의 경관이라고 합니다. 그 말은 제주도에 앉아 있는 저한테는 약 올리는 말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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