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지어 피어난 벚꽃이다. 그 무리를 거리를 두고 바라본다. 무리가 모여 무리가 된 벚꽃을 바라보면 꽃이 꽃인지 불꽃인지도 모르겠다. 어제도 오늘도 나는 건조한 공기와 불조심이 필요하다는 경고음을 들었다. 그 경고음들은 활활 타오르는 절정의 벚꽃을 지켜주는 보호자가 아닐런지. 거센 바람을 거느리고 나타나는 봄비가 덮쳤다면 이렇게 여러 날 꽃 치장한 산야를 즐길 수 있을 것인가. 산불 뉴스에는 걱정하고 발을 동동 구르는 안타까움이면서도 내 눈은 이 절정의 봄잔치에서 탄성을 올리기를 양보하지 않는다.

봄길따라 신화따라 역사따라 제주도지역사 역사탐방의 한 사람으로 참가했다. 1박2일이지만 시간은 아마도 2천 년은 충분히 이 길 위에 담는다. 지난 주말의 이틀이었다. 제주도 탐라국 창조 신화에 나오는 제주의 삼신인과 결혼한 세명의 벽랑공주의 나라 벽랑국을 찾아보았다. 역사실존이 확실하게 증명할 수 없는 역사라 유적지는 아니다. 역사기록과 지명 등으로 연구된 논문으로 추정이라는 설명을 들으며 완도와 그 일대가 벽랑국이었을 거라는 땅의 역사다. 지역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나마 구전신화처럼 남아있는 지명과 현재 주민들의 언어로 찾아내는 고대사는 끊어질 듯 이어 온 생명처럼 문자기록으로나 거대한 돌에 시간을 초월하는 기록으로 새겨 놓은 것이 아니라 바람에 날리는 풀잎처럼 이 사람 저 사람 특히 권력 가진자들 권력가진 나라들의 입맛대로 이랬다 저랬다 하는 이견들 속에서 진실로 남아있는 걸 찾는다는 건 쉽지는 않아 보인다. 고대 해상교역로의 중심이었던 이 지역의 고대국 벽랑국의 우리 선조는 마한에서 백제, 백제에서 통일 신라시대로 흐르는 역사의 강물에서 어떤 삶을 살았으며 그 삶을 어느 모양의 흔적으로 남겼는가는 여전히 더 열심히 연구해봐야 하는 과제다.

​장보고의 청해진 같은 곳은 이미 나라 차원의 발굴과 보호, 연구가 충분히 이루어졌다. 누구나 이 역사의 시간을 기리며 현재도 즐길 수 있는 편안함과 아름다움과 묵직한 의미는 제격에 맞는 대우를 잘 받고있다는 느낌이다. 다정한 친구, 특별히 다정한 친구와의 데이트 장소로도 아주 멋지다. 바다가 넉넉하고 물이 맑아 거울 같다. 햇살이 그득한 이 곳에서라면 비혼과 저출산의 고민을 함께 해보면 긍정적인 답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아이디어를 내어 주위 사람들이 껄걸 웃었다. 푸른 물은 햇살을 받아 다이야몬드처럼 반짝인다. 해상왕 장보고는 이 다이야몬드를 중국으로 일본으로 실어나르며 부를 만들어 신라인에게 풍성한 삶을 주었고 신라의 위상을 더 높게 했던가.

​해남 방산리의 장고봉 고분( 전라남도 기념물 85호)은 새로운 고대사를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고분이다. 경주의 신라왕릉을 생각하여 해와 달을 닮은 둥근 모양이려니 했는데 여긴 타원형이다. 앞부분과 뒷부분이 마치 물고기 모양이랄까 앞부분은 둥글고 뒷부분은 입체 삼각모양이다. 이런 모양의 고분은 '전방후원분'이다. 가로 세로가 길고 높다. 신라왕릉 보다 크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 모르면 야산이라고 할 만한 이 고분은 이런 형태의 고분이 전라남북도와 경남의 해안에 집중 발굴된다는 것으로 의미가 깊다. 일본에서는 더 넓은 지역에서 더 많이 발굴되는 형식이다. 고대에 있었음직한 인구 이동관계를 살펴 볼 수도 있고 교역관계가 형성되었음도 알 수 있다.

​제주도 근해는 물마루다 . 조수가 서로 마주쳐 물결이 높고 거칠다. 이국선이 표도하면 침몰한다는 제주바다에 대한 기록이다. 다른 나라 배들이 제주도에는 사고가 아니면 들어오지 않는다는 기록이다. 하멜의 표류를 생각한다. 울돌목도 그랬단다. 두 조류가 맴돌아 요동했다는 이순신의 명량해전을 장군의 백전백승의 전승을 남해의 바다를 바라보며 파노라마로 그려본다. 바다는 아름답고 위용이 넘친다. 우리의 바다, 넘실거리며 군무를 춤추는 바다, 잘 다듬고 훈련된 청년의 군살없는 근육같이 살아 움직인다. 무궁무진한 보고를 안고 있다. 이 바다를 왜 쇄국으로 쇳대를 채웠던가. 직접적으로 먹거리 주는 해산물이 있고 바다가 주는 희망이 있고 희망은 기상을 높인다. 받아들인 것은 소화하고 재생산하여 다시 나누어 줄 수 있는 재능이 많은 능력의 백성들이 숨 쉬는 나라다. 가난에 짓눌리며 허기진 배를 운명이라고 우길 것은 아니었다. 너는 종, 나는 주인이라고 우길 일은 더구나 아니었다. 농토보다 더 넓은 바다, 삼면이 생명을 보듬는 바다다. 바다의 생산능력에 눈을 돌렸어야 했다. 바다라면 우리의 바다라면 반드시 우리에게 청국이고 일본이고 작은 고추가 얼마나 당차고 매운가를 알게 했을 거다.

​나는 내륙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경북 북부지방의 고리타분한 양반 타령의 가풍이 나의 의식을 만들었을 테다. 이미 꿈틀거림의 속도로 바뀌긴 했겠지만 옛 사람들이 생명을 신에게 당부하고 여행하였던 항해를 안전하고 쾌적하게 물살 헤치느라 거푸거푸 흰 입김을 연신 뿜어올리는 거대한 배 위에서 바다를 내 안에 품는다. 대지보다 더 따뜻하고 포근한 바다를 내 고향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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