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감사

2023년을 맞으며 적어도 한 달에 한 편의 글을 감사의 제목을 담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느새 3월도 셋째 주가 된다. 조선시대 재상이자 영의정으로서 임진왜란을 지휘한 서애 류성룡의 영문 전기가 내 손에 들려 있다. 큰 감사요, 기쁨이 내게 왔는데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 잠시 망설여진다. 아마도 '가보'라는 단어의 무게감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미 오래 전 큰 가보가 우리 가족에게 생긴 것이 기쁘다며 졸작으로 사방에 알린 적이 있다. 나는 묻는다. 집안에 가보는 하나이어야만 하는가? 국어사전에 의하면 가보란 한 집안에서 대를 물려 전해오거나 전해질 보배로운 물건이라고 하고 물론 영어로는 family treasure라고 한다. 그러면 한 집안의 귀한 것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남편이 오랜 시간 지방에서 근무를 하고 은퇴를 앞둔 즈음 서울에서 새로운 직장이 생겼다. 친지도 친구도 없던 남녘의 생활이 너무 재미있고 안정적이었지만 늘 서울 생활을 원하는 나와는 달리 남편은 서울은 정이 안 붙는다며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도 꼭 집으로 돌아와 잠을 자곤 했다. 그이의 촌스러움이? 부담스러운 가운데 아직 아날로그적 감성이 녹아있는 낙산에 자리를 잡았다. 마침 우리가 서울로 이사 올 때의 낙산은 온통 벚꽃이 바람에 날리고, 아침과 저녁의 산책길에 만나는 건너편 인수봉과 북한산이 너그러운 품을 내어주어 아름답고 평안한 출발을 할 수 있었다.

​서울 생활이 2년 흐른 후 어느 날, 남편은 20년에 걸친 고전의 번역은 길을 내었으니 타인에게 양보하고 인물의 세계화를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고전의 세계화를 잠시 미루고 우리 선조들의 고매한 인격과 행동을 세계에 알리고자 마음을 먹은 것 같았다. 나의 생각은 늘 눈앞의 것을 좇느라 단순하고 명쾌하다. 남편은 이미 쉼이 필요한 나이였지만 그 길이 또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그이 만큼 잘 알지 못하는 까닭에 나는 새로운 생각에 힘을 실어주었고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아니 그이에겐 분명히 신이 허락하신 남다른 달란트와 인내와 의지가 있는 것 같았다.

​이미 '징비록' 영역을 통해 서애 류성룡을 알게 되었으므로 그 저자의 전기를 쓰고 싶어 했다. 7년 전 남편은 막상 집필을 시작함에 있어 서애에 관한 자료의 부재에 막막해했다. 임진왜란 당시의 활약을 적은 것은 쉽게 구할 수 있었으나 그 밖의 자료들은 이미 임진왜란에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전기를 쓸 계획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강을 건너야 하는데 배가 없다고 했다.

일단 서애가 유년시절부터 읽으셨던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서애의 정신세계를 알아보려면 그분이 읽으셨던 수많은 책을 다시 찾아 읽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단다. 또한 그의 조상에 대한 기록이나 황해도 관찰사를 역임한 부친과의 여러 기록들도 참조했다. 그렇게 책을 통하여 함께 여행하고 그분의 자취를 따라 읽다 보니 서애의 마음만은 그릴 수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수집한 자료들을 모아 글쓰기를 시작했다.

​어느새 세월이 흘러 7년이 지났다. 남편의 임진왜란이 드디어 막을 내렸다. 글로 그리는 초상화인 전기. 나는 손에 들려진 새로운 가보를 바라보며 남편에게 물었다. 서애의 훌륭하신 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한 마디로 업적(achievement)과 자세(attitude)인데, 그의 생은 임진왜란 이전과 이후로 구분된다고 말했다. 전자는 업적이요, 후자는 자세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남편도 나처럼 하루에 있어 아침보다는 황혼을 더욱 좋아하는데, 서애의 삶은 황혼이 더욱 아름답고 고귀하다는 것이다. 나라를 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불충과 일본과 화해를 주장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고향 하회로 낙향했는데, 그것에 좌절하지 않고 나라와 후세를 위해 불멸의 '징비록'을 저술한 것이다. 전쟁은 끝났어도 그에겐 새로운 전쟁의 시작이었다. 기억을 전쟁터로 삼아 역사 바로 세우기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다시는 임진왜란과 같은 참혹한 전쟁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바로 내가 말하는 남편이 의미하는 바 '자세'라는 것이다. 서애의 전기는 모름지기 국가의 지도자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가를 보여주는데 중점을 두었다고 남편은 말했다.

​버클리에서 책을 출판하고 먼 길을 돌아 이제 곧 출판기념회가 열린다. 나는 우리 가족의 새로운 가보를 통해 대한민국이 세계의 Korea로 뻗어 나가는 이 귀한 시기에 대중적인 K. culture를 뛰어 넘어 얼마나 귀하고 멋진 어르신이 우리나라에 계셨는지를 세계 만방의 사람들이 알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는 또 하나의 가보가 생긴 것이 너무 기쁘고 멀리 있는 가족들은, 물론 어린 손주와 손녀가 할아버지의 책을 읽으며 지혜롭고 그릇이 큰 사람으로 자라기를 기도한다. 시인의 말처럼 구부러진 주름살에 가족을 품고 이웃을 품고 가는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곁에 있어 좋다. 이것이 2023 년 3월의 감사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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