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은 설렘을 동반한다. 아직은 몸을 완전히 묻지 않은 낙엽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늘 첫눈을 몰고 오는 겨울로 기우는 늦가을 11월이면 난 11월의 아직 남아있는 것들을 사랑한다. 내가 태어난 8월을 모두 덥다고 머리를 내저어도 8월을 좋아했다. 그 뜨거움 속에서 열정을 맛보고 인내를 배우기도 했지만 이젠 슬그머니 가을을 기다리는 여름이 되었다. 그악함이 싫어진 것이다. 열정이 사라진 때문만은 아니길 바란다. 나이 듦과 함께 오는 변화일까?

​이 가을 많은 이의 자화상을 읽었다. 윤동주를 비롯하여 서정주, 노천명, 박두진, 김현승, 유안진 등이었다. 그들은 모두 시적 언어로 나름의 삶을 노래했다. 고백하고 벗은 몸으로 타인 앞에 내놓아진다는 것은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23세에 썼다는 서정주의 자화상은 아비가 종이었다는 고백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에게서 죄인을 읽고 가는 타인 앞에서 병든 수캐처럼 헐떡거리며 달려와 피가 섞인 시를 썼다고 말했다. 어째서 좀 더 나이가 들었을 때 한 번 더 자신의 자화상을 쓰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보았다. 그는 85세로 생을 마감하였으니 후반부에 멋진 또 한 편의 자화상을 남겼어도 좋지 않았을까.

목이 가늘다고 말한 김현승은 혈액이 철분 셋에 눈물이 일곱이라고 자신을 말했다. 가을이 외롭지 않게 차를 마신다고 했던 그는 진정 가을의 시인인 것 같다. 꽃이 시듦을 보고 열매를 맺게 하신 분에게 한없이 낮아지는 작가, 눈물의 의미에서 진정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를 발견하는 시인처럼 그의 겸허한 마음을 닮고 싶다. 대자 한 치 오픈 키에 두 치가 부족한 것에 불만을 품던 그이는 대처럼 꺾어질망정 구리처럼 휘어지기가 어려운 성격이 자신을 가끔 괴롭힌다고 자화상을 마감했다.

목이 길어서 슬픈 짐승을 쓴 노천명을 짐작케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슬픈 자신의 하얀 눈물을 하얀 종이에 그린다는 작가의 자화상도 있다.

또 박두진의 자화상은 어떠한가? 돌과 돌들이 굴러가다가 나를 두들기고로 시작하는 그의 자화상은 모래도 두들기고 물결과 물결이 굽이쳐 가다가도 두들긴다. 햇살 달빛 밤과 별빛도 때론 사랑이 두들기기도 하고 뉘우침이 두들기기도 한다고 고백한 그는 분노와 고독과 절망 속에서 맞으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었다.

우리가 잘 아는 윤동주의 자화상, 화자는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 가만히 들여다보곤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가고 돌아가다 생각하니 가여워 다시 돌아가 들여다본다. 사나이를 미워했다가도 그리워하며 추억 속의 자신을 회상하는 그 또한 우리의 다른 이름이었다.

유안진님은 한 생애를 살아보니 하늘과 땅만이 살 곳은 아니라고 했다. 허공이 오히려 살만한 곳이며 떠나고 떠도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고백했다.

시인들의 자화상을 살펴보니 그들은 모두 우리의 자화상인 것을 알게 되었다. 조금씩 서로의 환경과 상황이 다를 뿐 나처럼 때로 외로움에 지치고 슬퍼하는 그들, 예술을 사랑하고 신 앞에 무능함을 고백하고 애태우며 사랑하고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나 내일에 희망을 갖고 사는 또 다른 나 일 뿐이었다. 이젠 나의 자화상을 한 번쯤 도전해야 할 시점인 것 같다. 여름이라면 흉내 내는 것조차 어려웠던 나의 모습을 바람 부는 가을 날. 고운 말의 리듬으로 노란 은행잎에 담아 세상에 내놓고 싶다. 이 늦가을에 글을 쓴다면 감히 무언가 옮길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하나 여전히 나를 세상 밖으로 나타내는 일에 서투르고 무엇인가 내놓고 밝힐 것이 없어 소심해지는 내가 있을 뿐이다. 눈을 돌려 삶의 흔적을 남기는 방법으로의 자화상을 생각해 보게 된다. 그렇다면 누구라도 열린 문으로 들어갈 수가 있을 것이다.

나는 어떻게 주제를 잡을 것인가? 광활한 우주의 한 모퉁이 먼 곳에서 아름다운 초록 별을 발견한 호기심 많은 여인이 수많은 밤을 기도한 끝에 이슬에 묻어 아주 작은 존재로 이 땅에 왔다. 감사하게도 밝은 빛이 머무는 집에 거하며 소박하고 사랑이 넘치는 가족과 이웃 속에서 기쁨을 나누고 때로 슬퍼하다가 돌아갈 시간을 놓쳐버린 여인이라고 하면 되겠다. 본향을 그리워하지만 지상에 뿌리내린 삶의 길에서 존재 의미의 뼈를 묻고픈 적당한 행운이 따라 준 그녀라고 하면 되리라. 그러나 11월이 되면 어쩌지 못하는 그리움으로 높은 하늘을 깊은 눈으로 바라보는 여인으로 시를 마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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