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새재 : 영광의 길, 낙담의 길 그리고 통탄의 길

2022년 11월 8일, 깊어가는 가을이다. 10월 초에 충북의 단양과 충주호를 여행한 이후 올 가을에 2번 째로 아내와 같이 하는 여행이다. 숙소는 산림청에서 운영하는 '조령산 자연휴양림'으로 정하였다. 인근의 문경새재 길을 걷기 위함이다. 문경새재 길의 가을과 조일 전쟁 당시의 무기력한 조선의 역사기행을 하기 위함은 당연한 수순이다. 깊어가는 가을에서 늦은 가을의 분위기가 확연한다. 단풍의 빛깔이 많이 퇴색되었다.

이곳은 제3관문 밖의 출입구 인근이다. 양지 바른 곳이어서 아직 단풍이 붉은 빛을 발하고 있다.

제3관문의 북쪽이다 "문경새재 과거길"의 過去가 아니고 科擧이다. 이조시대 과거 시험 보러 가는 길의 의미이다. 이조시대에는 입신출세하는 유일한 방법이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야만 한다. 이 경쟁률은 현 시대에 비하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라 한다.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하여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금의환향'은 과거시험에 합격한 영남 지방의 선비가 통과하는 길이다. 과거 시험에 합격하였다 함은 지금의 어렵다고 하는 어느 시험에 통과한 사람보다 더한 가문의 영광 중에 영광이었을 것이다. 과거시험만이 양반에서 상민으로 전락을 방지하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우리는 출세한 소수만을 생각하여 금의환양 길이라고 하지만 합격한 소수보다는 훨씬 더 많은 불합격한 다수도 낙담한 마음 가지고 이 길을 통과하였을 것이다. 길 이름을 '낙담 선비길'이라고도 하여야 할 것이다. 출세하지 못한 더 많은 다수는 안중에도 없다는 세태는 수정되어야 한다. 

'책바위'도 조선에서 유일한 출세기에서의 과거 합격 등에 관련된 것이다. 우리가 흔히들 간과하고 넘어가지만, 우리들은 모두가 양반의 자손이라고 알고 있지만 황당무계한 생각이다. 조선시대에서 천민의 숫자가 많을 때에는 50% 이상이었다. 천민은 기생 노비 백정 등으로 구성되며 노비는 가축으로 키우는 말과 소보다도 싼 가격으로 거래가 되는 상품이었다

노비는 억울한 경우를 당하여도 주인을 고발하지도 못하고, 고발하였을 때엔 법에 의하여 죽음이 주어졌을 뿐이다. 그 시대에 천민이 과거 시험? 지금 소나 말이 국가 고시 등에 응시하는 경우가 있지 않음 또는 못함과 같다. 조선은 자국민(민족)을 노예로 거래하는 지구상 유일한 국가이었다. 필자는 우리 역사에서 조선의 역사를 안타깝지 못해 혐오의 역사라고까지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조선은 10%의 왕과 양반을 위한 국가이었다.

한강의 발원지는 태백시의 검룡소라고 대부분 알고 있다. 하지만 낙동강의 발원지는 잘 알지 못한다. 문경새재 제3관문 인근이 낙동강의 발원지라고 한다. 문경새재 제3관문에서 북쪽은 충북 괴산군이고 남쪽은 경북 문경시이다.

깊어가는 가을이다. 단풍의 색갈이 많이 바래었다. 

제3관문과 제2관문 사이에 있는 '귀틀집'이다. 주변에 흔한 통나무로 집을 지은 것이다. 이 귀틀집은 한국만의 양식이 아니고 전 세계에 퍼져있는 가옥의 형태이다. 지금은 문화재의 역할을 하는 곳이다. 

제2관문이다. 문경새재의 지형은 장수가 버티고 있으면 대 부대도 막을 수 있다는 협곡 지형이다. 조일전쟁 시 일본군은 이런 지형에 저항을 받지 않고 유유히 통과하여 한양을 점령하였다. 진군 속도가 점령 속도와 같은 이상한 전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은 그 당시 만 명도 안 되는 병력을 유지한 국가이었고 군인은 10%의 왕과 양반을 위한 지금의 경찰의 역할만 한 군인이었다.

​※ '임진왜란'이라 표기함은 우리의 역사 왜곡이다. '조일전쟁'이 맞다. 일본에 국권을 유린당하고 그 많은 백성이 희생되었음에도 亂으로 표기하는 것은 일본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변방의 무리로만 취급한 결과이다.

지금의 문경새재 길은 과거 조일전쟁 당시의 길이 아니다. 관광객의 편의를 위하여 넓게 만든 길이다. 조선은 전쟁에 대비코자 일부러 길을 정비하지 않고 기본적으로는 사람만 다닐 수 있게 한 길이 대부분이다. 올해 6월에 사단법인 '대관령 두메 길'의 초청 등산에 참여하였다. 현지인에게 들은 말에 의하면 조일전쟁 이전에 강릉과 대관령 사이의 길을 우마차가 다닐 정도로 길을 개발하였는데, 전쟁 이후 강릉의 행정 책임자(군수?)는 왜군을 이롭게 하였다는 죄목으로 처단되었다 한다. 선조가 우리 역사에 저질은 죄악 중의 하나이지만, 이 당시 조선의 길에 대한 인식이 이러하였다.

조선은 북방에서 용맹을 떨친 신립 장군을 급파하여 왜군을 막게 하였다. 신립 장군은 기병에 능한 장군이었다. 장군은 현지 종사관 등이 "적은 군대로 왜적의 대군을 방어할 곳은 지형이 혐한 조령뿐이다"라는 말을 무시하고 방어진을 후퇴하여 충주의 탄금대에 배수진을 처서 몰살당하였다. 더구나 활을 든 기병(騎兵)은 조총 앞에서 사격 연습의 표적 역할에 적합할 뿐이다. 조령에서 방어를 하지 못하여 통탄의 길이 된 것이다  

세계사에서 몽골의 군대(기병)가 전 세계를 점령할 정도로 맹위를 떨치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이유가 총의 발달이다. 활을 든 기병은 총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이보다 300여 년 뒤의 전쟁은 활 위주의 기병에서 총으로 전쟁 판도가 바뀐 지 오랜 이후 이다. 일설에 의하면 신립 장군이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친 까닭은 조급히 충원되어 훈련이 되지 아니한 병력을 가지고 어쩔 수 없이 배수진의 전법을 사용하였다고도 한다. 

조일전생 시 활약한 의병장 이강년의 의병항쟁 기념판이다. 조일전쟁 시 관군보다 절대적으로 기여한 병력이 의병이다. 왜군으로부터 조선을 구한 의병을 전후 이 병력으로 역모를 꾀할 수 있다는 선조는 의병장을 역모의 죄로 몰아 처단하였다. 선조가 국가에 저질은 또 하나의 범죄이다. 이후 몇십 년 후에 벌어진 조청전쟁(병자호란으로 표기함은 역사왜곡이다) 때에는 의병은 없었다 한다. 역사가 가르친 교훈이다.

16세기 말 7년 간의 전쟁으로 국토와 국민이 유린을 당하였고, 약 300년 이후에는 일본에 국권을 완전히 상실하여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국가와 우리 한민족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같은 대상인 일본에게 2번의 큰 변을 당한 것이다. 위의 상처 난 소나무는 일제가 2차 대전을 수행할 에너지로 활용할 송진 채취한 자국의 흔적이다. 

조선은 가난하여 1만 명도 안 되는 병력을 가졌으나 일본은 조선에 침략한 병력이 약 16만 명이었다. 예비 병력이 약 10만이었다. 조선 침략을 위하여 26만 명의 병력을 양성한 것이다. 다른 상황을 무시하면 일본의 국력이 조선의 26배라는 계산이 가능하다. 군인의 양성은 경제력이기도 하다. 조일전쟁은 아메리카가 발견된 시점에서 약 100년 이후이다. 세계사적 관점에서 보면 이 아메리카가 일본의 조선 침략과 연관이 있다. 

스페인은 아메리카에서 막대한 은을 생산(노획) 하여 본국으로 바로 가져가기 보다는 삼각 무역으로 부가가치를 더 높였다. 중국에서 만들어진 비단이나 일본에서 만들어진 조선 도공의 도자기 등으로 바꾸었다. 그 교환 장소가 지금의 필리핀 마닐라였고 이 때 일본 상인들은 막대한 부를 만들었다. 이렇게 창출된 부는 힘 없는 조선으로 불똥이 튄 것이다. 

과거를 잊은 문경새재 길은 아름답게 정비되어 가을을 만끽할 수 있는 길로 변하였다. 올 겨울에 흰눈이 많이 쌓인 설경을 감상할 수 있는 좋은 곳(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설경을 보기 위하여 다시 가 보아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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