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묵은 기사를 뒤지다가 발견했다.

김정은이 문재인 대통령을 ‘오지랖 넓은 중재자’라고 폄하했다고 한다.

불쾌하다. 옆에 있었으면 귀싸대기라도 올려붙였을 것이다.

‘오지랖’은 옷의 앞자락이다.

오지랖이 넓으면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을 완벽하게 덮어준다.

상대의 허물을 감싸고 두둔해 주는 배려를 ‘오지랖 넓다.’고 표현했었다.

즉 ‘가슴이 넓다.’는 말과 같은 의미의 관용어다.

참견하고 간섭한다는 것은 애정과 배려다.

그러므로 오지랖 넓다는 것은 흉이 아니라 고마워할 미덕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social animal이라고 배웠다.

사회는 개인을 기초로 성립하는 동시에 개인은 사회공동체의 형성자로 참여한다는 논리대로라면

타인의 삶에 관심을 갖고 참견하는 것은 지극히 바람직하고 당연한 일이다.

오지랖이 넓은 사람을 고맙게 여길망정 배척할 일이 아니다.

대체로 오지랖이 넓으면 공감능력(共感能力)이 뛰어나다.

호기심이 많고 적응이 빨라 사교적이며 친절하다.

그 때문에 이웃을 먼저 챙기고 이웃의 상처를 외면하지 않는다.

쉽게 손을 내민다. 바람직한 사회성이다.

참견이나 간섭은 바르고 그른 것을 가리기보다 애정과 배려로 여겨 고맙게 받는 것이 도리다.

이런 사람은 대체로 봉사 정신이 투철하여 매사에 이타적이다.

모든 일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리더십도 있다.

대체로 친하거나 호감을 느낀 사람의 오지랖은 무조건 정의라고 추켜세우면서

안 좋은 감정을 가졌던 사람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면 낄 데 안 낄 데 못 가린다고 헐뜯으며

돼먹지 않게 아무 데나 훈장질을 하려 든다고 비방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내면의 진심을 헤아리지 않고 개인적 감정만으로 평가하는 것은 바른 태도가 아니다.

낯선 이의 친절을 고깝게 여기거나 두렵게 여기는 사회 분위기가

‘오지랖 넓다’는 말이 참견이나 간섭을 부정적 의미로 비아냥거리는 말로 인식하게 만든 것 같다.

참견을 싫어하는 이유는 가치관이 다르거나

지향하는 목표가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상대방에 대한 감정적 대립이 가장 많은 이유가 될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의 말은 무조건 옳게 여기고

싫어하는 사람의 말은 무조건 틀렸다고 비방하는 것이 현실이다.

거슬리는 말일수록 고맙게 여겨 귀담아듣는다면 감정적 대립은 눈 녹듯 사라질 것이다.

김정은의 말도 곱씹어 속내를 우려내보면

거기에 우리가 다시 한번 반성하고 검토해야 할 방향이 숨어 있을 지도 모른다.

오지랖 넓은 것은 탓할 일이 아니라 반겨야 할 일이다.

오히려 곁사람에게 눈길도 주지 않는 냉담한 사회가 더 걱정해야 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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