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로 70길 103 (망우동)

 중랑구 망우동의 주민이 된 지 벌써 20년이 다 되어간다. 경기도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봉화산, 망우산, 용마산, 아차산을 다 둘러보았지만 내세울 만한 유적지가 보이지 않아 예부터 쓸모없어 버려진 땅으로만 여겨왔다. 사실 이 지역 어디에 유명한 인물과 관련한 유적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일제 강점기 때도 이곳에 공동묘지를 만들었는가 싶다. 내 젊은 날엔 망우리라고 하면 연상되는 것은 공동묘지였다. 처음 이사와 만난 이곳 출신 어느 노인이 하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자고 나면 들리는 소리는 ‘애고, 애고’ 곡소리밖에 없고 매일같이 그 곡소리만 들으며 살았으니 이곳에 무슨 인물이 태어나겠습니까?" 하긴 그럴 것도 같았다. 그런데 오늘 뜻밖에도 우연히 '충익공 신경진'의 묘역과 신도비(神道碑)를 근처에서 발견하였다. 바로 내 집 맞은편 마을 뒤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지척에 두고도 몰랐던 것이다.

신경진(申景禛)은 임진왜란 때 충주 탄금대(彈琴臺)에서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왜군과 맞섰지만 버티지 못하고 강물에 투신 자결한 도순변사(都巡邊使) 신립(申砬)장군의 큰 아들이다. 신립장군은 함경북도병마절도사로 두만강 북방의 야인을 소탕하고 육진(六鎭)을 방어한 공을 세워 함경북도병마절도사에 올랐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도순변사(三道都巡邊使)로 임명되어 충주 탄금대(彈琴臺)에서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왜군과 맞섰지만 군사력의 열세로 버티지 못하고 강물에 투신 자결하였다. 양가(良家)의 처녀를 첩으로 삼아 삼사(三司)의 탄핵으로 파직당하기도 했고, 또 졸병을 참살한 죄로 한직으로 밀려나기도 했지만,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서(追敍)되었다. 워낙에 선대부터 명문가였던 덕을 톡톡히 본 것 같다.

그의 아들 신경진은 아버지의 공로로 선전관으로 기용된 후 태안군수·담양부사를 거쳐 부산첨사로 기용되었다가 함경남도병마우후(咸鏡南道兵馬虞候)로 전보되자, 체찰사 이항복(李恒福)의 요청으로 경원부사와 벽동군수가 되었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이후 일등공신一等功臣)에 녹훈되고, 평성군(平城君)에 봉해졌다. 병조참판이 되어 훈련도감(訓鍊都監)·호위청(扈衛廳)·포도청의 대장을 겸하여 왕실 안전의 책임을 맡았다. 정묘호란 때 강화도로 왕을 호종(扈從)하여 이듬해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다. 임금의 총애를 배경으로 믿고 탐오(貪汚)하여 남의 집터 수천칸을 빼앗아 언관의 탄핵을 받기도 했다. 후에 복직되어 형조판서에 훈련대장을 겸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수하의 군사를 인솔하여 적의 선봉부대를 차단, 왕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할 여유를 마련하였다. 청나라와 화의를 성립한 후 다시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청나라의 요구로 최명길을 파직하고 영의정에 올랐으나 열흘도 못 되어 죽었다.

누구나 공과가 있을 것이며 또 같은 처사라도 공으로 보이기도, 과로 보이기도 하겠지만 냉정히 살펴보면 공보다는 과가 더 많았다고 할 만하다. 특별히 이루어놓은 시책은 없으면서 상신(相臣: 삼의정 즉, 영의정·좌의정·우의정 등을 이름)으로 처세하며 대를 이어 공신으로 권세를 누리며 살아온 흔적이 이곳 신도비(神道碑) 주변에 고스란이 남아있다.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비문을 짓고 박태유(朴泰維)가 글씨를 썼다는 이 신도비는 높이 368㎝나 되는 거대한 석비(石碑)로 화강암으로 조각된 거북 받침대 위에 올려져 있으며, 비신(碑身) 위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용머리 장식이 정교하고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신도비는 머리글인 두전(頭篆)은 이정영(李正英)이 썼으며, 비 건너편에는 신경진의 묘역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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