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밝아온다. 아침이면 찾는 내 친구 커피, 나 아닌 다른 이들도 이 시간 한 잔의 커피와 함께 떠오르는 태양을 마주하고 있지 않을까. 커피 시인인 윤보영의 시가 생각난다.

커피가 생각날 때는 커피를 마시자

커피 향기에 보고 싶은 사람이 깨어나

더 보고 싶기도 하겠지만

내 안에 꽃을 피우고 꽃길을 낼 뿐

봄이다. 언 땅 위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사이로 희망이 보인다. 어느새 꽃으로 올라온 작고 고운 얼굴을 만난다. 한 잔의 커피 향기 위로 떠나간 이와 먼 곳에 있는 이도 만난다. 커피의 마술이다.

커피 공화국인 대한민국에 사는 덕분에 누리는 작은 행복이 있다. 어린 날 열린 대문으로 들어가면 할머니께서 달려 나와 반겨주시듯 환한 웃음으로 나를 환영하는 곳을 찾아 간다. 가끔은 친척집을 가듯 먼 거리도 마다하지 않고 차를 달려 방문한다. 그곳에 큰 창이 있어 강이 보이는 곳이면 더욱 좋다. 산 속 나무 그림자가 기우는 곳이어도 좋다. 그런 선한 이웃과 정 많은 친척집이 내 머릿속에 몇 개 입력되어 있다는 것은 나만의 비밀스런 방을 갖고 있는 것처럼 가슴 설레는 일이다. ​나이 들어감이 행복한 순간이 있다. 이별이 떠나는 것이 아니라 멀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될 때, 흐르는 시간에 잠겨 좋은 이와 함께 침묵하며 사유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행복이 내 가슴 한 모퉁이에 둥지를 트는 시간에는 늘 커피가 함께 있다.

​300년도 전에 커피를 사랑한 많은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바흐는 ‘커피 칸타타’를 작곡하였다. 커피를 좋아하는 딸에게 온갖 방법으로 커피를 멀리하도록 실랑이를 벌이던 아버지는 커피를 끊어야 좋아하는 약혼자와 결혼을 시켜주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딸은 커피가 천 번의 키스보다 사랑스럽다며 얼마나 맛있고 달콤한지를 노래하며 아빠의 애를 태우는 내용의 커피 칸타타. 베토벤은 또 어떠한가. 그는 커피 한 잔에 원두를 60개 갈았으니 두 잔의 커피에는 120알, 친구 셋이 모이면 180알의 원두를 간 셈이다. 그렇게 작고 많은 원두를 세어가며 갈아가는 인내와 수고를 통해 작곡을 위한 영감을 얻곤 했다고 한다. 작곡가인 브람스는 커피를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만들어 마시는 것을 즐겨한 새벽의 바리스타였다. 발자크는 믿기 힘든 일이긴 하나 하루 50잔의 카피를 마신 적이 있다고 한다. 천재 작가로 알려진 이상은 네 번이나 다방을 차렸다고 하니 그 역시도 커피를 사랑한 인물이다. 그들도 나처럼 커피에게서 마음을 본 것일까. 우리의 친구 커피, 마음을 나누고 힘과 쉼을 주는 친구, 누군가는 인생이란 커피 한 잔이 가져다주는 따스함에 관한 문제라고도 했다.

​커피 향기 속에 힘들었던 젊은 날의 추억이 피어오르기도 한다. 그리고 함께 커피를 나누던 그리운 이를 떠올리며 시간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더 잘할 걸, 더 나눌 것을, 왜 많이 웃지 못했을까. 치열하게 살던 젊은 날, 나름 사치가 있었다. 가끔 백화점에 들러 블루마운틴 커피를 갈아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커피 향기가 퍼지는 차를 몰고 허드슨 강을 곁에 하고 달릴 때면 내일을 향한 꿈을 새롭게 꾸며 현실의 어려움은 잠시 잊었다. 그 시간만은 나도 잔잔한 물결 위를 떠가는 요트의 평온함을 즐겼다. 거대한 도시 뉴욕의 치열한 삶이 아니라 강 건너 뉴저지의 숲을 생각했다. 꽃이 피는 순간이었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지난 날을 추억하는 이 순간 커피가 곁에 있음이 감사하다. 문득 빅 아일랜드에서 자란 하와이언 코나 커피에 친구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친구가 다음 여행에선 고흐의 커피로 알려진 예멘의 모카 마타리 커피를 구해 오길 은근히 바란다면 너무 과한 욕심일까.

오늘도 나는 꿈을 꾼다. 가장 아끼는 것만을 챙겨 떠나는 산티아고 길 위에서 쓰고 달며 때로는 신맛이 나는 커피를 마시며 내 인생의 맛을 정의 내리고 싶다. 그것이 眞이고 善이고 美라면 얼마나,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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