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를 위한 토요편지 859호

더 늦지도 더 빠르지도 않게 장마전선이 북상(北上)하여 후덥지근한 여름을 적시며 습(濕)한 비를 뿌렸다. 무방비(無防備)였을까. 건조한 필자(筆者)의 마음도 상큼한 청포도의 7월도 빗속에 젖어 있다.

​도대체 봄이 언제였던가? 혹여 무심(無心)했던 것일까 6월의 열대야(熱帶夜)에 이르기까지 봄이 왔다 갔는지도 모른다. 도도한 세월이 두렵다. 실외(室外)에서 조차도 마스크 팬티를 벗지 못하고 2022년의 반년(半年)이 시나브로 흘렀다. ​말이 없는 세월은 천리마(千里馬)처럼 질주본능(疾走本能)이라도 지녔다는 말인가, 눈 깜짝할 사이라든지 세월이 화살 같다는 말들이 와 닿지 않을 만큼 순식간(瞬息間)이었다.

한 해의 절반을 ‘나름 열심히 살았노라’고 환청(幻聽)으로 들리지만 년초(年初)의 다짐과 각오 과거의 시간은 흔적이 없다. 연말(年末) 즈음에 성(誠)을 다하지 않은 회한(悔恨)과 자기변명으로 망년(忘年)하지 않으려면 운동화 끈을 다시 매야 한다. 늘 그랬듯이 한 해의 6개월쯤 지나면 조급증이 스멀거리기도, 성찰(省察)하기도 하지만 슬기롭게 살아갈 양식(糧食)은 역시 ‘자극(刺戟)’이다. 뉴욕 대학교 등에서 글쓰기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여성 작가 대니 샤피로의 ‘계속 쓰기(Still Writing)’에서 아래 글을 탐독(耽讀)하며 <산 밑자락>에 밑줄을 그었다. 밑줄은 刺戟이다.

​‘이제까지 무엇을 성취해왔건 우리는 날마다 산 밑자락에서 하루를 시작한다. 다들 이렇게 살지 않을까? 까다로운 수술을 앞둔 외과의사도 산 밑자락에 있다. 최후 변론에 나서야 하는 변호사도, 자기가 등장할 차례를 기다리는 배우도, 학기 첫날 출근하는 선생님도 산 밑자락에 있다. ​가끔 우리는 스스로 책임자라고, 혹은 상황을 파악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삶은 대개 바로 거기 있지만, 지나친 자기 확신에 사로잡힌 우리를 때려눕히는 것이 삶이다.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이런 교훈을 오랫동안 배우고 겪어왔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더라도 견딜 수 있다. 우리는 더 낫게 실패한다. 우리는 자세를 바로잡고, 자기 자신을 추스르고, 다시 시작한다.‘

​이 즈음에서 책장을 넘길 수가 없었다. 산 밑자락이라는 본지점에서 半年의 세월이 흘렀지만 허둥대는 筆者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빠른 세월을 뒤따라가며 단순히 늙어서는 안 된다. 몽중일여(夢中一如), 꿈속에서도 핵심 화두를 놓치면 안 된다. 늙으며 더 성장하고 어른스럽게 성숙해야 한다. ​"척벽비보, 촌음시경(尺壁非寶, 寸陰是競) 지름이 한 자나 되는 보옥도 시간에 비하면 보배라고 할 수 없다. 한 자 되는 구슬보다도 잠깐의 시간이 더욱 귀중하니 시간을 아껴야 한다."

​언제나 그랬듯이 한 해의 반이 지나면 크고 작은 희망의 불씨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기대하는 후반전이 아니라 ‘촌음(寸陰)’을 아껴야 하는 초조한 연장전과 같다. 반환점을 지날 때마다 생각나는 귀절(句節)이 있다. ‘거문고 줄을 풀고 다시 고쳐 매듯이‘라는 ‘해현경장(解弦更張)’이다. '처음의 그 마음처럼'이라는 省察의 의미도 있지만 ‘내일의 내일을 준비하라‘는 가르침이다.

​나이테만큼의 산전수전(山戰水戰)을 겪으며 많은 어려움을 이겨냈지만 지금과 같은 불안과 불확실성의 위기(危機)는 경험하지 못했다. 시간 속에 있었던 모든 일은 다시 돌릴 수도 없다. 더 늦지도 더 빠르지도 않게 새로운 반년을 준비해야 한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지나온 6개월보다 더 험준한 <산 밑자락>에 와 있다. 불만족스러운 과거의 어두운 크레바스(Crevasse)에 빠지지 않도록 천천히 서둘러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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