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보인다!”, 세상을 떠날 때 이보다 더 성스럽고 경외(敬畏)한 엔딩이 또 있으랴. 생면부지(生面不知)였지만 동시대를 함께 살았다는 이유만으로도 애통(哀痛)함이 컸다. ‘지성(知性)과 영성(靈性)’ 그 경계(境界)를 자유롭게 왕래(往來)하던, 이 시대의 석학(碩學)이자 이 나라의 큰 스승이신 고(故) 이어령 선생님께서 세상을 떠났다는 부음(訃音)때문이다. 세상의 지혜와 지식이 줄어든 것처럼 허탈했다. 잊을 수 없는 1988년, 정적(靜寂)이 흐르는 넓은 운동장에 굴렁쇠를 굴리는 소년을 홀로 등장시켰던 서울 올림픽 개회식에서 너무나 한국적인 여백(餘白)의 미학(美學)과 더불어 놀라운 경제성장과 민주화에 성공한 나라의 자긍(自矜)과 자부심을 세계에 각인(刻印)시켰으며, 신통방통한 창조성과 박람강기(博覽强記)의 큰 지식이 쌓인 ‘이어령’이라는 도서관이 하늘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날씨조차 유난히 흐렸던 지난 달 2월 26일은 쉽게 잊지 못할 것 같다. 이틀 후, 저서(著書)를 제외하고 생전에 어떤 인연도 없으니 가당치 않는 노릇이었지만 영결식장(永訣式場)으로 가 문상(問喪), 즉 죽음을 묻고 조용히 조문(弔問)하고 싶었다. 언감생심(焉敢生心), 어른의 마지막에 대해 대놓고 슬피 울 수는 없지만 전 이화여대 교수 이인화의 ‘이어령 선생을 보내며’라는 애끊는 추모(追慕)의 글을 읽고 또 읽으며 울컥한 눈물을 참았다. ?스승과 제자의 별리(別離), 그 아픈 추도문(追悼文)을 애틋한 연민(憐愍)으로 밑줄을 그으며 비통함으로 필사(筆寫)했고 요지(要旨)는 이렇다.

부고(訃告)와 함께 우리는 이어령의 생애를 정면으로 마주 보게 된다. 그리고 이어령의 지성과 에너지가 우리 사회에 얼마나 큰 부분을 채우고 있던가를 깨닫고 놀라게 된다. 오늘날 한류 커뮤니티 1억 명에 빛나는 한국 문화가 이 위대한 해석자에게 얼마나 많이 의지해 왔는가를 실감하게 된다. 나에게 이어령은 추억의 불빛으로 빛나는 신전(神殿)이다. 나(=이인화)는 그때 선생의 말을 반도 이해할 수 없었다. 햇살만이 이파리 사이로 쏟아져 아스팔트 위에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생전 언론 인터뷰에서 “새하얀 눈길에 첫발 찍는 재미로 살았다“고 말씀하신 선생님께서는 스물 둘 나이에 지식 사회에 혜성처럼 등장하여 이야기꾼으로 종횡무진(縱橫無盡)하였고, ‘굴렁쇠’에서 ‘죽음이 보인다‘까지 지적 폭발을 멈추지 않은 활화산 같은 선지자(先知者)의 길을 가신 르네상스맨으로 압축된다. “죽음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삶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는 준엄한 이어령 선생님의 말을 筆者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우리는 필멸(必滅)의 존재’,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즉 ‘죽음’을 수용하는 공부는 늘 하고 싶었다. 이어령 선생님께서 소천(召天)하실 때까지 화요일마다 인터뷰 해왔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작가 김지수는 감탄했다.

?“선생님은 참으로 스승이시군요!” 망설임 없는 선생의 답은 지독하게 단순하고 명료했다. “스승의 굴레에 조차 나를 가두지 말게. 나를 전 국민의 스승으로 추앙(推仰)하는 것은 몹시 부담스러운 일이라네. 그것은 사실이 아니거든.“ 곱씹어 삼킬수록 가슴 뜨겁게 뭉클하다. 남은 인생이 무의미하고 허기지지는 않을 것 같다. 심호흡을 가다듬고 모자를 벗으며 정중히 고개를 숙인다. (故) 이어령 선생은 죽음을 극복하는 영웅이 아니다. 웰다잉(Well - dying), 또는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자기가 결정하는 죽음이라는 ‘존엄사’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묵직한 질문에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가르쳐 주는 우리들 인생의 교사이며 사표(師表)다. 2000년 후,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은 그 시대의 '논어(論語)'가 될 것이며 '子曰'의 '子'는 '이어령'선생이라는 추측은 확신에 가깝다. ‘만날 때마다 선생은 소멸을 향해 가는 자가 아니라 탄생을 향해 가는 자다웠다‘는 김지수 작가처럼 창조적 탄생을 거듭할 뿐 소멸(消滅)를 외면하는 현자(賢者)의 많은 가르침을 10분의 1도 이해 못하지만 이삭 줍는 마음으로 한 마디씩 음미(吟味)하면서 筆者의 삶 속에 있는 그 죽음을 기억하면 시대와 나이를 뛰어넘어 뭔가 손에 잡히고 보이는 게 있을 것만 같다. 선생님의 영전(靈前)에 탄생의 촛불을 켜고 마음을 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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