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동부 성산에 위치한 해녀박물관을 방문했다. 해녀의 위상이 한국사는 물론 제주문화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이제 많이들 알려졌고 인식되었다고 생각된다. 그 알려짐의 부피만큼 국민적인 에너지가 투입되어 그런지 건물의 위치도 경관도 부속 공원도 정말 아름답고 좋았다. 마침 날씨도 청명하여 가을의 전형적인 색깔이라 제주도 특유의 고운 바다빛과 하늘이 아우러지고, 아직은 초록의 옷을 완전히 벗지않은 잔디의 청청함과 더불어 정말 속이 시원하고 눈이 호사하고 내 인식에 변화가 오는 몸도 마음도 새 바람을 쐬고 온, 시간을 멋지게 보낸 나들이었다.

?해녀가 제주도에만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른 육지의 해안지방 어촌에도 더러더러 해녀 활동이 있었다고 나는 알고 있다. 우선은 해녀하면 제주도를 떠올릴 만큼 제주도와 해녀의 관계가 가장 전형인 것 같으니까 제주도 해녀에 대한 내 앎만 말하겠다. 제주도는 해녀 뿐이 아니다. 다른 모든 제주 여성을 억새에 비유되기도 한다. 억새는 어떤 식물군들 보다 생명력이 강하게 번식하는 식물이다. 척박한 제주땅에서 육지로부터의 변방이라 중앙정부의 국가정책상 홀대를 받아 온 지난 역사 속에서, 살기 위하여 자손을 번성하게 하기 위한 생존의 처절한 삶의 길이었다. 그 아픔을 간단하게 그럴 듯한 제주여성들의 경제적인 자립심, 근면성, 인내심과 자부심이란 카드만 붙일 것인가는 한 번 생각해볼 만한 우리 역사의 아픔이다. 제주도는 조선시대 군역이란 군의무가 과도하게 주어졌다. 이를 피하기 위하여 많은 남자 젊은 인력들이 사라졌다. 이로 인한 인력 공백을 제주여성들이 맡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걸 막기 위하여 200년 동안 제주도는 출도를 금하는 법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섬의 주민으로는 어느 역사에나 잘 있을 수 없는 억울한 불평등의 법이었다.

?제주특산물에 대한 진상품 전복의 양은 과다하였다. 공을 빙자한 공무원들의 사복을 채우는 수량도 만만치 않아 남자들의 섬 이탈을 더욱 부추겼다. 제주도에는 해녀만 있었던 건 아니다. 포작이라는 남자들이 이 작업을 하였으나 군역과 진상 할당량에 견디다 못해 남자들이 제주도를 떠남으로써 맡겨진 제주여성들의 노동이었다. 근대로 들어와서는 일본의 해산물 소비증가로 해녀들이 대거 일본으로 진출하여 제주 경제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1938년경에는 20만 제주도민 중 1/4에 해당하는 대부분 젊은 남자들 5만 명이 도일하여 일을 하였다. 결과로 제주도 여성노동력의 중요성은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다시 제주여성들은 척박한 환경이라는 걸 완전히 무시한 채 어업, 농업, 가사일 등 모든 걸 떠맡게 되었다. 제주도 여성들의 근명성은 높이 사야한다. 충분한 보상도 받아야 한다. 물론 정신적인 보상이다. 그렇다고 칭찬만으로 칭송만으로 기록을 아름답게 남기는 걸로 마감할 것인가? 아직 역사의 길은 멀었다. 왜 제주여성들은 제주해녀들은 연약한 몸으로 이중삼중의 가정과 사회와 국가의 부담을 감당해야 했었나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단순하게 제주여성의 근면성이란 횃불로 서술적으로만 받아들여도 좋은가는 한 번 쯤 시간을 두고 생각 해 볼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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