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가 이야기하는 것들은 38년 전의 과거의 시간이다.

시간의 공백이 현상, 감상, 느낌, 기분, 영향 등 모든 부분에서 퇴색하기도 했을 것이고 혼돈을 주기도, 과장하거나 축소 또는 망각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내 욕심은 바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인 것처럼 살아있는 이야기가 되기를 바란다. 욕심을 너무 부렸는가. 지난 회의 이야기는 처음의 흥분한 상태가 그대로 시간을 옮긴 것 같다. 그때의 내 울렁거리는 마음처럼 글이 두서없이 흔들렸다 싶다.

?미국은 나에게 애증관계의 연인처럼 심한 갈등을 주는 땅이다.

자연선택인 고국이 아닌 타국에서 내가 살 뿐 아니라 내 아이들이 살아가게 되는 이민은 선택 자체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하고 자유가 보장되었고 문화가 발달한 나라다. 누구에게나 개방되었고 누구나 꿈을 이룰 수 있는 꿈의 성지다. 선망의 땅, 선택된 사람들의 고장, 지구촌의 중심에 선 엄청 큰 문이 활짝 열린 무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과연 그 무대가 나를 주인으로 허락할까 하는 의문은 불안과 소외감, 소수 민족으로의 위축감을 주기도 한다. 한국에 대하여도 그렇다. 고국을 떠난다는 것에 대한 녹녹지 않고 만만하지 않은 섭섭함과 미안함, 뜨거움과 싸늘함, 비판과 긍정이 섞인다. 떠나서 뒤돌아보는 고국 역시 미국을 향한 만큼이나 묘한 다면체의 관계가 성립된다.

?선택이라지만 이민 선택은 가만히 들여다보면 주체의 선택이 아니다.

거기에는 상당한 힘으로 사회적 환경이 밀어붙였다. 메이 플라워호의 영국인 첫 이민자들은 종교 자유가 선택의 첫 순위였고 나에게는 경제적인 선택이다. 많은 한국이민 1세들은 자녀교육을 선택의 첫 순위라고 말한다.

?언니는 한 주간 휴가를 받았다. 학교가 방학기간이라 아이들 데리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시카고 시내를 돌아다니고 외곽 지대를 드라이브했다. 박물관과 식물원에 가고 리글리 필드에서 시카고 컵스의 야구 경기도 보았다. 일로 늘 바쁘기만 하는 부모가 저들과 놀러 다니니 아이들은 웬 떡이냐다. 아이들은 사촌과 어울려 신났다. 물 만난 물고기다.

?여기는 전국에서 학부모들이 아이들 데리고 학습차 여행 오는 곳이다. 이 빌딩은 미국에서 가장 높은 전망대다. 미시간 호수는 그대로 바다다. 호변의 건물들이 아름답지. 사람들이 자유롭고 활달하잖아. 이런 언니의 말들은 아이들의 소란스러움과 합하여 내 귀에서 윙윙거리는 귀 벌레다. 시카고는 먼 곳 수평선 밖의 내 항해가 아직 닻을 내리지도 못하고 있는 미지의 도시다.

?드디어 쇼는 끝났다. 일 주는 후딱 지나고 언니 내외는 일하기 시작하였다. 아이들은 저들끼리 학교 운동장에서 운동하고 도서관도 다니며 공원에서도 잘 놀았다.

비슷비슷한 집들은 바둑판같이 정연한 선의 도시에서 헷갈리게 만든다. 길을 육안으로 구별하기는 힘들다. 우편함에 달려 있는 숫자가 아니면 내가 다닌 길도 다시 찾기 힘들다. 언니 집은 시카고 시의 북쪽으로 시의 행정구역이다. 빈민가이거나 흑인 거주지에 해당하지는 않으나 정원이 있어 여유로워 보이는 한적한 동네는 아니다. 한 주택에 두 세대가 살 수 있는 빌딩형이다. 집들은 줄을 만들며 나란히 어깨동무하고 있다. 낮 동안에는 동네에서 사람들은 볼 수가 없다 집은 말끔하게 페인트 되어 있는 모습으로 잘 관리되고 있었다. 가까운 곳에 큰 공원이 있다. 공원은 키 크고 가지가 무성한 나무들이 많고 작은 키의 꽃나무도 많다. 산책로가 잘 만들어졌으며 곳곳에 의자가 있어 나 같은 마음이 싱숭생숭한 사람이 하염없는 생각을 할 수 있어 위로가 되었다.

?전 날 저녁에도 언니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 서는 일 하지 않고 살 수 없다. 어차피 일은 하게 되니 너무 서두르지 말고 안달하지 말라고. 언니가 나를 위로하는 말에도 나는 부아를 끓였다. 일하는 사람에게는 그런지 몰라도 일해야 할 사람에게는 내가 할 일이 있을 것인가에 대한 불안한 마음이 더 무겁고 고생스럽다. 돈도 못 벌면서 고생하느니 일하는 것이 낫지 않느냐고 대들었다.

?안정, 좋은 임금, 보험, 베니핏이 주어지는 직장을 가질 수 있는 분야에서 일하기 위하여 단기 직업훈련을 받을 것인가? 팔 걷어붙이고 스몰 비즈니스를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만 했다.

?미국 회사에 다니는 학교 졸업 후 제일 먼저 유학 온 친구는 우선 보기에는 그럴듯한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친구에게 전화 통화로 조언을 구했다. 그녀는 언제나 자유업을 하는 교포들이 부러웠다고 어차피 고생문에 들어섰는데 눈 질끈 감고 장사하란다. 이것저것 걸친 것들 다 벗어버릴 아주 좋은 기회다. 배우겠다는 생각 말고 손발 움직이겠다는 생각해라.

?나보다 1년 먼저 LA로 이민 한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내가 조언을 구하기도 전에 먼저 꼬신다. 이 좋은 기회에 내 장사하지 웬 직장 타령이냐고. 그녀가 어떻게 장사하고 있는지 견학하고 가라면서 시카고 정착 전에 엘에이 방문을 적극 권한다. LA가 기후 좋고 장사하기 좋으며 교포도 많아 살기 좋다고.

?아름답고 평화로운 공원의 벤치에서 희희낙락 아이들, 한가하고 행복한 아기와 엄마와 유모차, 말처럼 달리며 뛰며 운동하는 청소년들, 간혹 눈에 들어오는 남녀쌍의 깊은 움직임들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밀려오고 있는 내 삶의 결코 쉽지 않은 치열한 장터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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