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선수들처럼 비대면(非對面. Uncontact)의 건조한 삶일지라도 사랑하며 극복(克服)해야

관중이 없는 프로야구, 선수들에게 연민을 느끼지만 나름 뜨겁다.

"야구(野球)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라는 유명한 격언이 있다.

마지막 아웃 카운트가 전광판에 표시가 될 때까지 ‘승패(勝敗)를 알 수 없다’는 뜻이다.

그 새삼스러운 것 없는 진리가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변종(變種)을 잉태하면서까지 물러설 줄 모르는 끈질긴 코로나-19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자연을 함부로 대했던 타락한 인간의 무지(無知)로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 공격에 쩔쩔매고 있다. 그저 물러서기를 바랄 뿐, 창의적인 퇴치 방법이 없다.

눈물겹게 방역수칙을 호소하는 노란 옷을 입은 사람들과 자원봉사의 천사 같은 의료진, K-방역의 주인공들에게 엄지척을 보낸다.

K-방역에 기대어 호가호위(弧假虎威)하며 확진자 숫자에 매달리는 권력자들은 세금을 자기 돈처럼 뿌리며 단계별 봉쇄, 거리두기 등 국민의 자유로운 삶을 압박하고, 손 소독과 마스크 쓰기 같은 감염병(感染病) 건강 상식을 앵무새처럼 말한다. 속수무책의 다른 표현이다.

이런 와중에도 정치인들은 밥그릇 싸움으로 정신이 없으며, 점점 커지는 우울함과 답답함을 위무(慰撫)하기보다는 공포와 불안감만 조성할 뿐, 그 누구도 코로나 팬데믹 이후의 희망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이 답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슬픔의 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찾아오리라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괴로운 법. 모든 것이 순간이고 모든 것이 지나가리니

지나간 모든 것은 아름다우리."

러시아를 대표하는 시인 '푸시킨'도 지금의 우리처럼 콜레라 시대를 경험한 적이 있다.

1830년, 치사율 50%의 역병(疫病)으로 석 달간 작은 영지에서 자가(自家) 격리(隔離)를 했다.

바이러스의 창궐(猖獗)로 죽음이 코앞까지 밀려왔지만 그는 또 詩를 썼다.

"그러나 죽고 싶지 않다. 살고 싶다. 생각하고 고통받고자. 슬픔과 걱정과 불안 한가운데

내게도 기쁨이 있으리니" 고통스런 세상을 견딘 푸시킨은 닥친 삶을 사랑했다. 그래서 오늘도 詩를 다시 읽는다.

지독한 바이러스가 차단해버린 일상의 장막(帳幕)을 詩(노래)로써 걷어내면서, 우울한 나(我)를 위로해야 한다.

너와 나의 無知에 전쟁을 일으킨 바이러스는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잠시 물러섰다 해도 또 올 것이다. 과거의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새로운 일상을 창조해야 한다.

시작된 곳에서 끝날 수도 있지만, 끝난 곳에서 또 시작될 수 있다.

野球를 사랑하기에 환호하는 관중이 없을지라도 땀 흘리는 프로야구선수들처럼 비대면(非對面. Uncontact)의 건조한 삶일지라도 사랑하며 극복(克服)해야 한다.

치유 없는 시대를 그렇게 치유해가는 것이다.

코로나 시대 이후, 세상을 이기는 백신 프로그램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다.

진부(陳腐)한 말로 들리겠지만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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