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바로티의 생애를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

역사상 최고의 테너로 꼽히는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생애를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다. 론 하워드 감독의 2019년 작품으로 2020년 개봉되었다. 2007년 작고한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직접 출연했다. 2006년 췌장암 수술을 받은 이후 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가 2007년 9월 6일 모데나 자택에서 향년 71세로 별세했다.

파바로티는 3 옥타브를 소화하는 음계를 가진 사람이다. 그의 어린 아이는 아버지가 매일 저녁 외출하는데다 차 안에 가발과 가짜 수염 등을 가지고 다녀 아빠 직업이 밤도둑인줄 알았다는 우화도 나온다. 테너는 자연스러운 목소리가 아닌 지어내는 목소리라고 한다. 보통 사람 2배 이상인 그의 큰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음의 세계는 인간 최고의 발성이다.

파바로티는 역사상 최초로 클래식으로 1억장의 음반 판매와 음악 차트 올킬 신화를 만든 슈퍼스타다. 성악계에 가장 큰 사건은 음악계에서 가장 위대한 3인조로 불리는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의 ‘쓰리테너’ 콘서트였다. 플라시도 도밍고의 지원으로 백혈병을 완치한 카레라스를 위로하기 위해 만난 자리에서 나온 아이디어였다. 그래서 1990년 로마 월드컵 전야제에서 오페라와 팝을 결합한 사상 최대의 공연이 펼쳐졌다. 이것이 바로 역사상 전례 없는 무대로 불리는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의 ‘쓰리테너’ 콘서트다. 화면으로만 봐도 감동적인 장면이다. 이 공연은 세 테너의 운명을 완전히 바꿔 놓았을 뿐만 아니라 하루 아침에 스포츠 팬까지 오페라를 흥얼거리게 만든 음악계의 대형 사건이었다. 라이브 공연 당시 무려 13억명의 시청자가 관람했고, 앨범 발매 2년 만에 1,100만장이 판매되는 기염을 토하며, 클래식 장르를 전 세계에서 가장 대중적인 음악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최고의 전성기로 이끌었다. 음반사 데카에서 출시한 공연 음반은 클래식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기네스북에 기록된다.

이렇게 이 세 명은 주빈 메타의 지휘로 월드컵 전야제마다 공연을 열게 된다. 1994년 미국 월드컵 때에는 LA 다저스 스타디움에서 열렸고 보다 이벤트 성향이 강해지며 인기를 얻었다.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파리에서 월드컵 전야제를 기념했고. 2002 한일 월드컵에서는 한국과 일본의 공동개최를 기념하여 2001년에 서울에서, 2002년 전야제날 일본 요코하마에서 공연을 갖는다. 다시 의기투합하여 2006 독일 월드컵에서 공연을 열 것임을 선언했지만, 파바로티의 사망으로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마지막 쓰리 테너 콘서트는 2005년 멕시코 몬테레이에서 있었다.

수많은 관중 앞에 두 팔을 크게 벌리며 환호를 받던 파바로티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에게도 아픔은 있었다. 딸이 근육이 없어지는 희귀병에 걸려 죽다 살앗고 파바로티는 모든 스케줄을 접고 딸의 간호에 전력 투구했다.

또, 34살 연하의 새 여자를 만나면서 아내와 이혼했고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아야 했다. 새 아내와 쌍둥이를 분만했으나 아들은 사산했고 딸만 미숙아로 태어나 다행히 살아났다. 파바로티의 이혼으로 가족관계가 소원해졌으나 딸의 출산으로 파바로티가 할아버지가 되면서 다시 관계가 복원되었다. 역시 가족은 피를 나눈 관계이기 때문이다.

영국 런던의 하이드 파크 공원이 폭풍으로 초토화 되었을 때 파바로티가 자선 콘서트에 출연했다. 그때 다이아나 왕세자비가 참석하고 그때부터 둘의 관계는 자선콘서트를 확대 발전하는 기점이 되었다. 그날 폭우 속에서도 우산이 뒷 사람 시야를 가린다며 우산을 접자고 했을 때 다이아나 왕세자비가 먼저 우산을 접자 수많은 관중들이 맨 몸으로 비를 맞으며 펼친 콘서트는 감동이었다.

이외에도 1992년에서 2003년 사이 파바로티의 고향인 모데나에서 매년 열린 ‘파바로티와 친구들’ 콘서트에는 다양한 분야의 거물급 가수가 초청됐다. 그와 호흡을 맞춘 가수로는 U2는 물론, 퀸, 스티비 원더, 엘튼 존, 스팅, 본 조비, 안드레아 보첼리, 에릭 클랩튼, 셀린 디온, 스파이스 걸스, 나탈리 콜, 딥 퍼플, 머라이어 캐리까지 무려 79팀에 달한다. 파바로티의 주도로 보스니아 전쟁 피해 아동들을 위한 자선 행사로 기획 된 이 공연은 제2차 세계 대전을 보고 자란 파바로티의 유년 시절이 큰 영향을 주었다. 성악가가 유행가 가수들과 어울려 품격을 떨어 뜨렸다는 비난이 따랐으나 개의치 않았다. 그가 만든 파바로티 재단은 그의 사후에도 세계 여러 나라에서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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