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아이콘

영화의 한장면
영화의 한장면

'체 게바라는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래도 그의 이름과 이미지는 잘 알려진 인물이다. 지구 반대편 남미에 살던 사람이라 관심이 덜했다. 공산주의자여서 우리에게는 한 때 금기시 되었던 신비의 인물이다. 그래서 영화는 이미 2008년에 만들어졌는데 최근에야 국내에서 개봉되었다. 그것도 상영관이 많지 않고 상영 횟수도 제한적인데 그나마 심야시간 대라서 보기 어려웠다. 1부 아르헨티나, 2부 게릴라 편을 모두 보려면 4시간 이상을 봐야 한다.

이 영화는 2008'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이 제작한 다큐멘터리성 작품이다. '시카리오''알레한드로'역으로 나왔던 '베네시오 델 토르''체 게바라'로 출연해서 2008년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게바라가 혁명의 아이콘으로 강력한 이미지를 남긴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병원 원장의 아들인 금수저 출신, 의대 졸업, 과테말라에서 혁명에 실패하고 도망쳤고, 쿠바에서는 혁명을 성공시킨 주역, 쿠바 국립은행 총재, 쿠바 산업부 장관을 지내다가 홀연히 사라져 콩고, 볼리비아에서 게릴라 활동을 하다가 39살의 나이에 볼리비아 정부군에 의해 사살된 점, 수염과 검은 베레모가 잘 어울리는 잘 생긴 미남 등이다. 그의 사진을 찍은 기자가 저작권을 개방하여 온갖 상품에 등장한 얼굴 등도 그의 이미지를 깊게 인식시켰다.

게바라는 아르헨티나 출신이다. 쿠바는 가보지도 않은 나라였다. 그러나 혁명운동 당시 카스트로를 만나면서 쿠바 혁명을 성공시켜 쿠바에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래서 쿠바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 것이다. 게바라가 혁명 운동에 몸을 담은 것은 청년 시절 아르헨티나에서 모터사이클을 타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부터 싹이 텄다. 전국을 돌아보니 사탕수수, 옥수수, 탄광 등에 종사하는 농부 광부들의 생활이 비참했고 남미 각국은 군부 독재로 신음하고 있던 때였다.

당시 쿠바는 바티스타 군부 독재로 양민들이 수탈당하고 있던 시절이라 혁명의 진군이 쉬웠다. 양민들이 이들 반군들 편이었던 것이다. 연전연승하며 수도 아바나까지 진군했다.

이후 카스트로 덕분에 여러 공직을 거치며 출세 가도에 올라탔는데 어느 날 그는 홀연히 편지 한 장을 남기고 떠났다. 일설에는 그 당시 공산주의 종주국이었던 소련의 미움을 사서 그 압력으로 사임하고 떠났다는 말도 있다.

그리고 그는 머리카락을 뽑아 대머리로 변장하고 이름까지 바꿔 볼리비아 혁명군에 들어간다. 같은 스페인어를 쓰기 때문에 처음에는 의심하지 않았으나 미국 CIA는 그가 게바라라는 것을 알아낸다. 이것은 볼리비아 반군들에게도 외국인의 지휘 아래 정부군과 맞선다는 자존심과 관계 는 일이라 리더십에도 문제가 생겼다. 게바라가 워낙 잘 알려진 혁명 영웅이라 그의 존재감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볼리비아는 쿠바와 달랐다. 이미 토지 개혁이 이뤄져 농민들이 군부 독재 정부에 반감이 약했다. 게바라는 반군이지만, 양민들에게는 강탈 대신 꼭 돈을 주고 곡식이나 가축을 사고 의사 출신으로 치료까지 해주며 인심을 샀으나 소용없었다. 게릴라 전술로는 미국 CIA의 지원을 받는 정부군의 막강한 화력과 절대 수에서 밀렸다. 결국 게바라는 산 속 전투에서 잡혀 민가로 끌려 나와 사살 당했다. 재판도 없는 즉결 심판이었다. 그의 손은 증거품으로 잘려 미국 CIA에 보내졌다.

그가 주장한 혁명의 이유에 대해, 볼리비아는 병원이 100km 밖에 가야 하는데 그것부터가 혁명의 이유라고 했다. 사랑이 신조였다. 인간, 정의, 진실에 대한 사랑을 강조했다. 남미의 혁명을 세계에 퍼뜨리자는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가족도 있는데 밀림을 돌아다니며 고생을 자초한 풍운아다. 쿠바에는 그의 이름을 딴 공원도 있다 하니 기회가 되면 가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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