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궐도로 본 궁궐 나무

창경궁의 노거수

창경궁에는 궁궐 중 파괴가 가장 심하였던 탓에 남아 있는 고목나무가 다른 궁궐에 비하여 훨씬 적다. 창경궁의 100년 이상 된 고목나무는 느티나무 2그루, 회화나무 2그루, 주목 1그루, 향나무1그루, 황철나무 2그루, 백송 3그루, 회화나무와 느티나무의 연리목이다. 이중 가장 나이가 많은 나무는 춘당지 남쪽에 자라는 느티나무로서 나이가 500년이다. 사도세자의 비극을 듣고 보면서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약 400년된 선인문 앞의 회화나무 한 그루가 우리의 마음을 아리게 한다.

150년으로 추정되는 회화나무와 130년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 연리목
150년으로 추정되는 회화나무와 130년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 연리목
춘당지 북쪽의 100년 이상된 백송 3그루
춘당지 북쪽의 100년 이상된 백송 3그루
춘당지 서쪽의 400년 넘은 느티나무
춘당지 서쪽의 400년 넘은 느티나무
춘당지 남쪽의 500년 넘은 느티나무
춘당지 남쪽의 500년 넘은 느티나무
함인정 앞의 150년 넘은 주목150년 넘은 주목함인정앞의 150년 넘은 주목
함인정 앞의 150년 넘은 주목
함인정앞의 300년 넘은 향나무
함인정앞의 300년 넘은 향나무
관천대옆의 100년 넘은 황철나무
관천대옆의 100년 넘은 황철나무
남행각옆의 300년 넘은 회화나무
남행각옆의 300년 넘은 회화나무
사도세자의 죽음을 지켜 본 400년 넘은 회화나무
사도세자의 죽음을 지켜 본 400년 넘은 회화나무

 

◆“동궐도(국보249호)”로 만나는 나무

창덕궁과 창경궁은 합쳐서 동궐(東闕)이라고 한다. 동궐도의 제작년대는 1827년경으로 작자 미상이다. 다만 궁궐의 도화원의 화공들이 그린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현재 고려대와 동아대에서 소장하고 있다.

계절은 초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며 상세한 궁궐그림이이다. 2백여 년 전 궁궐에 어떤 나무를 심고 가꾸었는지를 짐작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귀중한 그림이다. “동궐도”의 그림에서 나무 종류를 분석한 자료를 보면 소나무가 559, 향나무 등 기타 침엽수가 36, 활엽수 큰 나무가 1,620, 키 작은 관목이 600그루로서 전체 나무의 숫자는 2,815그루이다. 소나무가 20%를 점유하고 있다. 소나무 사이사이에 갓 잎이 피기 시작하여 길게 늘어진 버들이 유난히 눈에 띄고 분홍 꽃이 만개한 복숭아나무와 진달래로 짐작되는 작은 꽃나무가 궁궐의 운치를 더해 주고 있다.

그 외 침엽수로는 잣나무, 전나무, 주목, 향나무, 활엽수로는 느티나무, 회화나무, 참나무, 음나무, 뽕나무, 단풍나무 등이 여기저기 자라고 있었다. 꽃나무와 과일나무로서는 매화, 모란, 배나무, 앵두나무, 개암나무, 대추나무, 자두나무, 살구나무, 밤나무 등이 있었으나 《동궐도》 그림으로 명확히 구분해 내기는 어렵다.

창경궁의 우리 나무 이야기

창경궁은 일제의 질곡에서 벗어난 한참 후인 1984년에 들어서야 옛 건물을 새로 짓고 나무를 심는 등 본격적인 궁궐 복원사업이 시작되었다. 이때 창경궁 나무의 가장 큰 변화는 일제가 심어둔 벚나무의 제거였다. 그 자리를 새로운 나무로 복원하면서 중부지방에 자라는 주요 나무들은 대부분 조경수로 심겨졌다. 홍화문에서 명정전, 함인전, 환경전, 통명전까지로 이어지는 복원 공간 이외는 모두 나무를 심었다. 궁궐 중 창경궁이 가장 많은 나무가 새롭게 심겨진 셈이다.

버들은 창경궁을 짓고 난 다음 해인 성종 15년(1484) 임금은 궁 안이 들여다 보이지 않게 빨리 자라는 버들을 심으라고 한다. “동궐도”를 보면 창경궁의 마구간이었던 마랑(馬廊) 앞, 홍화문과 선인문 앞(지금의 서울대 병원 자리) 등 여러 곳에 능수버들이 그려져 있고 지금도 궁궐의 곳곳에 능수버들이 심어져 있다. 능수버들은 아름다운 자태를 감상하는 것뿐만 아니라 활쏘기의 표적 나무가 되기도 했다. 최고의 명궁은 왕이 참석한 가운데 늘어진 능수버들의 잎을 맞히는 것으로 우열을 가렸다고 한다.

회화나무는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 남쪽에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선인문이 있다. 문의 안쪽 금천 옆에는 줄기가 휘고 비틀리고 속까지 썩어버린 회화나무 한 그루가 자란다. “동궐도”에도 보이는 나무이다.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가 죽은 곳이 이 근처이고 비극적인 사건이 많이 발생한 선인문과 역사를 같이한 나무이다.’

원래는 궁궐의 권위를 상징하는 나무다. 그 기원은 주나라 때 삼괴구극(三槐九棘)이라 하여 조정의 외조(外朝)에 세 그루의 회화나무를 심고 우리나라의 3정승에 해당되는 삼공(三公)이 이에 마주보고 앉아 정사를 논했다는 ‘주례(周禮)’에서 기원한다. 또 좌우에 각각 아홉 그루의 대추나무를 심어 고관들이 둘러앉았다고 한다.

진달래는 세조 3년(1457), 진달래가 만발할 즈음 남녀 7, 8명이 대궐문 앞을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지나갔으나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일이라 하여 이를 용서해주었다고 한다. 연산 12년(1504)에는 장의문(藏義門)에 탕춘정(蕩春亭)이란 새 정자를 짓고 산 안팎에는 진달래를 심었는데 왕과 왕비가 자주 거동하여 봄을 감상했다고 한다. 임금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예나 지금이나 진달래는 변함없이 우리와 가장 가까운 꽃임에 틀림없다. 음력 3월 3일의 삼짇날은 제비가 돌아오는 날이라 하여 봄을 맞는 마음으로 꽃전(花煎)을 부쳐 먹는 풍속이 있다.

단풍나무가 궁궐에 많은 것은 중국의 한나라 때 궁궐 안에 단풍나무를 많이 심은 탓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궁궐에도 단풍나무를 쉽게 만날 수 있다. 창덕궁 후원에는 참나무, 때죽나무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나무가 단풍나무다. 창경궁의 단풍은 11월 초, 중순이 절정이다.

뽕나무는 조선조에 들어오면서는 비단 생산을 더욱 늘려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처음 나라를 열어 불안정한 민심을 수습하고 백성이 편안히 살게 하려면 산업생산을 통한 수입증대가 필요했다. ‘비단입국‘의 기치를 높이 들 수 있었던 이유는 명나라에 보내는 조공과 신흥귀족들의 품위를 높이기 위한 비단의 수요도 만만치 않아서다. 태종 때는 집집마다 뽕나무를 몇 그루 씩 나누어 주고 심기를 거의 강제하다 시피 하였다. 이후 세종으로 내려오면서 누에치기는 더욱 독려한다. 예부터 내려오던 친잠례(親蠶禮)를 강화하여 왕비가 직접 비단 짜는 시범을 보이기도 한다. ‘님도 보고 뽕도 따던’ 그 옛날의 청춘남녀들은, 무성한 잎으로 은밀한 사랑을 가려주던 곳이 뽕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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