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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숙의 미국생활기] 애플 13
[김갑숙의 미국생활기] 애플 13
  • 김 갑숙 기자
  • 승인 2019.11.01 21: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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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

폭서의 여름이 지나면 혹한의 겨울이 온다고들 말한다. 이 말에 은근히 겁이 났다. 더운 여름은 견뎌냈지만 혹한은 싫다. 세탁소는 냉방도 그렇지만, 난방도 만족할 만한 온도를 유지하기 힘들다. 실내 공기가 쉽게 탁하여지니까 탁한 공기와 신선한 공기가 교체될 수 있도록 공기 통로의 문을 늘 열어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독하게 추위를 타는데 겨울이 기록적인 혹한이라면 어쩌나 지레 겁을 먹고 있었다. 그 첫해에는 특별히 난동이었다. 일월 말까지 눈 한 번 내리지 않았고 거의 추적추적 비가 내리곤 하여 도시가 더럽게 보이기도 했다.

1월 셋째 월요일이었다. 이 날은 케네디 대통령 시대 흑인 민권운동가였던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의 생일을 기념한 공휴일이었다. 공휴일 책정되고 초기여서 주마다 이 날을 공휴일로 선택한 주도 있고 선택하지 않은 주도 있었다. 뉴욕 주는 공휴일이었지만 학교와 공무원 은행 정도의 기관에서만 휴일이라 휴일 다운 날이 못되었다.

​1월 중순은 계절적으로도 한가한 시간이고 그나마 줄어든 일양도 겨울옷들이라 일하기도 쉬웠다. 반쪽 공휴일이라도 공휴일이라는 좀 느긋해지는 마음도 있고 하여 좀 늦은 시간이라 하여도 오히려 그 시간이 비즈니스 정시간이었다. 가게 와서도 일 시작하지도 않고 문만 활짝 열고는 이웃의 델리에서 사 온 커피를 가게 밖에서 즐겼다.

옆에 있던 남편이 "어~ 저기 펫샵에서 연기가 나오는데." 다급한 음성이었다. 불이 나는 건가 하는 의심도 하기 전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지붕과 문의 맨 윗부분 틈새로 가늘고 작은 화마의 붉은 혓바닥이 날름거렸다. 불이 난 거였다. 나는 가게로 뛰어들어와 전화기를 들고 911을 터치했다. 저쪽에서 응답은 즉각적이었다, 불이 났다는 말은 제대로 언어화되었다. 덜덜 떨면서 다급한 음성이었지만 상황 전달은 된 듯하다. 이어서 주소를 물어왔다. 어쩌면 좋으랴 나는 내 가게의 주소를 깜빡했으니. 머뭇머뭇, 주저주저, 그 사이에서도 가빠지는 내 호흡이 나를 옥죄어왔다. 이제는 내가 주소가 생각났더라도 입으로 소리 낼 수 있으리란 확신도 없었다.

​소방서는 우리 가게에서 불과 50미터 거리다. 가게 앞의 직선의 차도와 좌우로 꺾을 수 있는 간선의 차도가 있는 삼거리 바로 그 건너편이다. 주소를 기억하고 말을 만드는 작업보다 내 몸을 날려 달려가는 것이 훨씬 더 빠를 것만 같았다. 전화기를 내동댕이 치고 소방서로 달렸다.

​소방서 앞에는 눈에 쉽게 발견될 수 있는 큰 알림 벨이 있어 금방 찾았다. 소리도 퍽 요란스러웠다. 내가 미처 벨을 터치하기도 전에 담당 직원이 나왔고 이미 그 직원은 주소도 확인한 후였다. 응급전화기에는 발신인 번호와 주소가 동시에 뜨는지 아무튼 이미 그 직원은 어느 집이란 걸 파악하고 있었다. 평소에도 나와 안면이 있는 사람이라 너무 당황하지 말라는 충고 겸 위로도 주었다. 걱정 말고 중요한 물건이나 챙기라고. 내 가게가 아니라 펫 삽이라니까. 다행이라고 바람의 방향이 서쪽이라 너 가게에는 피해가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가게 건물은 부자동네의 상가건물로는 초라하다. 임시 양철 건물처럼 허술한 건물이었다 단층으로 일직선 길죽한데 서쪽 끝의 기게 가 펫샵이고 동쪽 끝의 가게가 내 가게다. 발화지점에서는 제일 먼 곳이라 빨리 진화가 이루어진다면 하는 기대를 해 볼 만도 했다.

블루호라이즌 가게가 발화지점이고 반대편 끝 가게가 크리너다.
블루호라이즌 가게가 발화지점이고 반대편 끝 가게가 크리너다.

그날 나를 위로하는 이웃들의 말대로 신은 내 편이었다. 아침부터 잔뜩 불쾌한 표정을 하였던 하늘은 끝내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가뭄에 억지로 내리는 비처럼 인색하였지만, 가는 비가 하루 종일 내렸다. 바람은 서쪽 하늘로 서쪽하늘로 날아갔다. 동쪽으로 긴꼬리만 남기며 날아갔다. 날씨가 보조 역할을 하는 진화작업은 쉽게 불과의 싸움에서 끝장을 낼 수 있었다. 건물은 반만 탔다. 여섯개의 가게 중 전기사고로 발화한 펫샵, 여행사, 유리가게만 피해를 보았다.

​진화가 빨리 이루어졌더라도 불이 내뿜는 연기는 풍향에 따라서 세탁물들을 충분히 망가뜨릴 수 있었다. 연기의 지독한 냄새는 손님 누구라도 반기는 친구가 못된다. 연기냄새는 세탁으로 지워낼 수 있는 약한 놈도 아니다. 그날의 그 바람이 반대 방향이었다면? 정말 생각해보기도 싫은 재앙이다. 가게 인수하여 발등의 불만 끄면서 지내다 보니 미처 보험에 가입도 하기 전이었다. 화재 다음 날 모든 걸 카버 하는 보험에 가입하였다. 사후 약방문이란 나처럼 보통 사람들이 하는 평균수준의 어리석은 행동이다.

​다음 날 빌딩 주인이 반은 화재로 찌그러 든 빌딩을 둘러보았다. 바로 우리 가게 밖에서 소방대원과 대화하였는데 소방대원이 나를 가리키며 저 레이디가 조기 발견하여 진화가 가능했다는 말을 하는 모양이었다. 묘하게도 빌딩의 오너는 그리 고마워하거나 다행이란 표정이 아니었다.

​넉넉한 화재보험이 준비되었으니 차라리 전소하여 새 빌딩 올리는 것이 그에게는 더 치부의 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래저래 신은 그날 분명 나의 손을 들어주었다. 진실로 마음이 가난하였던 나는 다시 한번 더 진심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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